북한산성 12문 종주
나홀로 번개답사 북한산성 12성문 종주 |
나홀로 회원님 중에서 최근에 운동이나 활동을 안하셔서 저와 같이 몸이 찌뿌듯하신 분들은 나오시기 바랍니다. 가다 못가면 내려와서 막걸리 한 잔 할 겁니다. 종주 못한다고 큰일 날 것도 아니고...
참여하실 분들은 꼬리글을 달아 주시거나 아니면 1/7(일) 09:00에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 분수대 앞으로 나오셔서 전화주시기 바라며, 한 분이라도 나오시던 안나오시던 9시 20분 출발합니다.
1. 북한산성의 역사적인 고찰
사적 제162호인 북한산성은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북한산성은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뒤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북방의 성으로 132년(개루왕 5년)에 축조했다. 이 성은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구실을 했으며, 근초고왕의 북진정책 하에서는 북정군의 중심요새지가 되기도 했다. 삼국이 모두 군사요지로 여겨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는데, 475년(개로왕 21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이 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전사시킴으로써 백제는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 뒤 553년(진흥왕 14년)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북한산성을 차지하고서 진흥왕순수비를 여기에 세웠다. 603년(진평왕 25년) 고구려군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했으나 곧 격퇴당했다. 또한 661년(무열왕 8년)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군과 함께 20여 일 동안 포위 공격했을 때 성주 동타천이 성 안의 주민을 동원해 끝까지 성을 지켰다. 고려시대에는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고려 태조의 재궁을 옮긴 일이 있는데 이때 성을 증축했으며, 1232년(고종 19년) 이곳에서 몽골군과 격전을 벌였다.
1387년(우왕 13년) 개축했다. 조선시대에는 양 난을 겪은 뒤 도성 외곽성을 강화하자는 축성론이 일어나, 1711년(숙종 37년)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실시해서 둘레 7,620보(3,716m)의 석성을 완성시켰다. 건축물로는 대서문·동북문·북문 등 13개의 성문,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등의 장대, 130칸의 행궁, 140칸의 군창,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 26개소의 저수지, 99개소의 우물이 있었다. 현재 삼국시대 토성은 약간 남아 있을 뿐이고, 대개는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 남아 있다.
12성문 종주란 북한산성 능선상의 12성문을 종주 하는 산행을 일컫는다. 북한산성 안의 성문은 모두 14개, 원효능선상에 시구문(서암문), 북문 등 2개의 성문이 있고 주능선 상에는 위문(백운봉암문), 용암문(용암봉암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등 6개의 성문이 있으며 의상능선 상에는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대서문 등 4개의 성문이 있다. 또한 계곡에 중성문과 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코스를 약간 복잡하게 잡으면 14성문종주도 가능하지만 능선상의 12성문만을 산행 대상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능선을 따라가는 산행이지만 원효봉능선상의 원효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백운대까지의 구간과 위문에서 용암문까지의 만경대, 용암봉구간이 위험하여 실제 산행은 우회구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위문에서 바로 주능선으로 진입하기 때문에 정상인 백운대는 선택코스가 된다.12성문의 종주하는 방법은 두 가지. 어느 문을 기점으로 시작하는지 여부이다. 첫 번째는 의상봉능선, 산성주능선을 거쳐 원효봉능선으로 산행하는 방법과 반대로 원효봉능선을 먼저 시작해 의상봉능선으로 끝을 맺는 방법이 있다.
3. 북한산성 12 성문 종주 일정 1). 일정: 1/7(일) 오전 9시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 분수대 앞
2). 회비: 없음(도시락/간식/생수 개별 지참)
3). 종주 코스 : 산성매표소∼대서문∼의상봉∼가사당암문∼용출봉∼용혈봉∼증취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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