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서울역사문화포럼

세검정,석파정답사

서울문화 2008. 6. 10. 23:23
 

세검정,홍지문,탕춘대성,대원군별장,석파정답사



1날짜:2001년 4월6일

2장소:상명대학교 정문앞(경복궁역135번버스로20분거리)

3조사목적:우리의 선조들이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하여 노심초사 하였던 세검정,홍지문,탕춘대성을 답사하고 조선말에 시대를 풍미하였던 대원군별장,석파정을 확인하며 조상들의 땀과 혼이 서려 있는 문화유적을 소중히 보존한다.


4알게된점:


(1)세검정(洗劍亭)(서울시 기념물 제4호)


 1)위치:종로구 신영동,자하문길 건너 홍제천변

 

 2)내력:세검정은 광해군을 내�은 인조반정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후기 영조 19년(1743)에 세운 것으로 추측 되며,흔히 세검정하면 광해군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는 세검(洗劍)으로 이해하지만, 영조때 세검정을 세우고 현판을 달았다면 이는 정의의 칼로 평화를 구가하는 상징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세검정은 다른 정자와 달리 평면이 ‘정(丁)자’형의 6각 정자이다.조선시대에는 사관(史官)이 기록한 사초(史草)를 정리하여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였다.이 일이 끝나면 여기서 종이를 재생하는 세초(洗草)를 하였으며, 조정에서는 해당 관원에게 으레 세초 하사연을 베풀었다.


(2)홍지문(弘智門)(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3호)


 1)위치:종로구 홍지동 산 4번지(상명대학 정문옆)


 2)내력:홍지문은 조선후기 숙종 45년(1719)에 탕춘대성을 쌓으면서 출입문으로 건축된 것인데 일제때 관리 소홀로 문루가 내려앉았고,오간수문마저 내려앉았으나 1977년에야 서울시에서 정면3간,측면2간으로 복원하였다.

이 문은 처음 축조할 때 서울의 북쪽에 있는 문이라 하여 한북문(漢北門)이라고 하였고,일명 남문(南門`)이라고도 부른 것은 탕춘대성 전체로 볼 때 남쪽 문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3)탕춘대성(蕩春臺城)


 1)위치:종로구 홍지동(상명대학  구내 서북쪽)


 2)내력:숙종 44년(1718)도성의 북쪽 창의문 서쪽에서부터 북쪽을향하여 북한산 비봉 남쪽까지 연결하는 약 4km의 석성을 축조하고 탕춘대성,또는 별칭으로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이 서성은 사천(沙川)을 통과해야 하였으므로 이 사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숙종 45년(1719) 5간대수문을 홍예로 쌓고 그 위에 성을 쌓았으며,또한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성문을 건설하고 그 문명을 홍지문(弘智門)이라 하였다.

탕춘대성을 쌓은 후에는 장의사 터에 군사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를 만들고,인근의 평창동에는 대동미를 저장하는 평창(平倉)을 지어 놓았다

영조 26년(1750)에는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과 함께 수도 서울을 수어하는 5군영의 하나인 총융청(총융청)을 연융대로 옮김으로써 이 곳은 군사 및 병참기지로 알려졌다.



(4)대원군 별장(大院君別莊)(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호)


 1)위치:종로구 홍지동(자하문길끝,석파랑)


 2)내역:이 건물은 예술가이며 국회의원을 지낸 손재형이 1958년에 석파정에서 대원군 별장을 뒤뜰 바위에 옮겨 놓았다.이 건물은 석파정의 사랑채라기 보다는 별당으로 보이며,구조를 보면 3량 맞배지붕에 ‘ㄱ’자로 꾸며졌고,앞퇴에는 대청마루 앞쪽을 제외한 양쪽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집안의 구조는 거의 한국식으로 큰방,건넌방,대청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대원군 별장은 원래 위치했던 석파정으로 이전하여 복원시키는 것이 마땅하나 소유주의 찬동을 얻지 못해 홍은동 네거리를 내려다보며 쓸쓸하게 서 있다.

(현재 석파랑이라는 한국 음식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5)석파정(石坡亭)(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6호)


 1)위치:종로구 부암동(자하문 서쪽 도로변)


 2)내역:이 집은 조선말 세도가 김흥근의 별장으로 당시에는 삼계동 정자(三溪洞 亭子)로 불리었다가 흥선대원군이 차지하면서 석파(石坡)흥선 대원군의 호를 붙여 석파정으로 고쳐진 것으로 나타난다.

일본식 정자인 석파정 안의 여러 건물 외에도 특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안양각 오른쪽 뜰에 자라고 있는 수백년 된 반송(盤松)이다.



느낀점)조선왕조는 임진,병자란을 치른 후에 서울 사수를 결 정하고 북한산성을 축성하고 비상시에 이 성을 수비         하려고 탕춘대성과 홍지문을 만들고 연융대를    만들었으며 대동미를 저장하는 평창을 지어 놓았다.

       이처럼 땀과 혼이 깃들은 축성이 있는 반면, 세도가들

       이 풍류를 위해 지은 석파정과는 대조를 이룬다.

창덕궁.hwp
0.01MB
세검정,석파정.hwp
0.06MB
사육신묘 .hwp
0.03MB
단상.hwp
0.04MB
우암송시열,심우장.hwp
0.04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