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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심포지엄/박만길

서울문화 2008. 8. 24. 11:30

제4회 서울문화사랑포럼 학술심포지엄 (2003년 6월 13일)

발표자 : 박 만 길

- 갑신정변(甲申政變), 현장을 중심으로


갑신정변은 1884년(고종21) 개화당(開化黨)이 청국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으킨 정변이다.

1) 정변의 경과와 신 정부의 수립

개화당은 마침내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홍영식(洪英植)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우선 국왕과 왕비를 창덕궁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기고 군사 지휘권을 가진 수구파 거물 한규직(韓圭稷)·윤태준·이조연(李祖淵) 등과 민비수구파 거물인 민태호(閔台鎬)·민영목(閔泳穆) 등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다. 그리고 개화당의 배신자인 환관 유재현(柳在賢)도 처단하였다.
개화당은 뒤이어 곧 신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여러 단계의 인사 발령이 있었으나, 최종적인 신 정부의 각료는 영의정 이재원(李載元 : 국왕의 종형), 좌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겸 좌포장(前後營使兼左捕將) 박영효,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판(左右營使兼代理外務督辦) 및 우포장(右捕將) 서광범(徐光範), 좌찬성 겸 우참찬(左贊成兼右參贊) 이재면(李載冕 : 대원군의 嗣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신기선(申箕善), 예조판서 김윤식(金允植), 병조판서 이재완(李載完 : 이재원의 아우), 형조판서 윤웅렬, 공조판서 홍순형(洪淳馨 : 왕대비의 조카), 호조 참판 김옥균, 병조 참판 겸 정령관(兵曹參判兼正領官) 서재필, 도승지 박영교(朴泳敎) 등이었다.
신 정부 각료의 구성은 개화당 요인과 국왕 종친의 연립내각으로 되어 있었다. 개화당으로서는 신 정부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임시적이라도 종친을 중용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화당의 소임 분담은 개화당 대표(좌의정)에 홍영식이 추대되고, 재정은 김옥균, 군사는 박영효와 서재필, 외교는 서광범, 국왕의 비서실장 책임은 박영교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개화당의 신 정부는 12월 5일 새로운 개혁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개화당은 동시에 국왕의 이름으로 미국공사·영국총영사·독일영사 등 각국 외교관들을 초치하여 신 정부의 수립과 개혁정치의 실시를 알렸다.
개화당의 정변에 놀란 청군 측은 12월 5일 개화당의 지지자로 위장한 심상훈(沈相薰)을 경우궁으로 들여보내 민비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그들의 계획을 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청군의 계획을 알게 된 민비는 경우궁이 좁아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창덕궁으로 환궁을 적극 주장하자 국왕도 이를 지지하였다.
김옥균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 방어에 극히 불리한 점을 들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지만, 고종의 명에 거역할 수 없어 경우궁 옆의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桂洞宮)으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옮겼다. 이곳은 경우궁보다 넓었으나,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도 창덕궁보다는 방어가 유리한 곳이었다.
그런데 민비는 계속해서 창덕궁 환궁을 요구하였고 국왕은 또한 민비를 적극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은 끝까지 방어에 불리하다는 이유를 들어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일본군 병력이면 청군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12월 5일 오후 5시 국왕과 왕비의 거처는 창덕궁으로 옮겨졌다.
개화당의 국왕에 대한 호위는 경우궁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왕을 중심에 넣고, ① 내위(內衛)는 개화당의 장사들(충의계 맹원들과 사관생도 약 50명) ② 중위(中衛)는 일본군(약 150명) ③ 외위(外衛)는 조선군 친군영 전후영병(약 1,000명)으로 하여금 3중으로 방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이 너무 넓어 개화당은 극히 불리한 입지적 조건에서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2) 혁신 정강의 공포

정변을 일으켜 신 정부를 수립한 개화당은 그들의 새로운 개혁 정치의 지침인 혁신 정강을 제정, 공포하였다. 갑신정변의 혁신 정강은 고종이 계동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 12월 5일 저녁에 승정원을 진선문(進善門) 안방에 설치하고, 김옥균의 주도하에 좌의정 이재원, 우의정 홍영식, 서리독판교섭통상사무 서광범, 병조판서 이재완, 좌우영사 박영효, 호조참판 김옥균, 도승지 박영교 등 신 정부의 주요 대신급들이 협의하여 결정하였다. 여기서 결의된 것을 우승지 신기선으로 하여금 청서하게 하여 홍영식이 국왕에게 상주하였다.
갑신정변의 혁신 정강은 12월 5일 저녁부터 12월 6일 새벽까지 식사도 거른 채 밤을 새워 협의되어, 6일 오전 9시경에 국왕의 전교 형식(傳敎形式)으로 공포되고 서울 시내의 요소에 게시되었다. 또한, 이날 오후 3시 고종이 개혁 정치를 천명하는 조서(詔書)를 내려서 공포한 정강의 실시를 선언하였다.
혁신 정강의 조항은 상당히 많아 일본인의 기록에는 80여 개 조항에 달했다고 하나, 현재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은 김옥균의 ≪갑신일록 甲申日錄≫에 수록되어 있는 다음의 14개 조항이다.
①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을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의 곤란을 구하며 겸하여 국가 재정을 유족하게 할 것 ④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그 중에서 재능 있는 자가 있으면 등용할 것 ⑤ 그 동안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중에서 심한 자는 처벌할 것.
⑥ 각 도의 환상제도(還上制度)는 영구히 폐지할 것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 ⑧ 순사제도(巡査制度)를 시급히 실시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그 동안 유배, 금고(禁錮)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⑪ 4영(營)을 합하여 1영을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近衛隊)를 시급히 설치할 것.
⑫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戶曹)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일체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합문(閤門) 안의 의정소(議政所)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뒤에 왕에게 품한 다음 정령(政令)을 공포하여 정사를 집행할 것, ⑭ 정부는 육조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하게 할 것 등이다.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14개조는 당시 개화당 신 정부의 개혁 정치의 의지와 기본 내용을 집약적으로 공포한 것이었다.

3) 실패와 원인

고종이 혁신 정강을 재결하고 개혁 정치 실시 조서를 내린 12월 6일 오후 3시에 청군은 마침내 1500명의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창덕궁의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각각 공격하여 들어왔다.
이에 대항하여 외위를 담당한 친군영 전후영의 조선 군이 용감히 응전하였으나,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고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다음은 중위를 담당한 일본군의 차례였으나, 그들은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병하여 버렸다. 일본군은 그 이전부터 철병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덕궁의 넓은 지역에서 개화당의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내위만으로는 정면에 부딪힌 1500명의 청군을 도저히 대항할 수 없어 갑신정변은 청군의 무력공격에 패배함으로써 개화당의 집권은 ‘3일 천하(三日天下)’로 끝나게 되고 말았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변수(邊樹)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여 청군에 넘겨준 후 피살되었다. 그 뒤 국내에 남은 개화당들은 민비수구파에 의하여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 명이 피살되고 개화당은 몰락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으로는, ① 청군의 불법적인 궁궐 침범과 군사적 공격 ② 개화당의 일본군 차병(借兵)의 실책과 일본군의 배신적 철병 ③ 개화 정책을 지지할 사회계층으로서의 시민층의 미성숙 ④ 민중의 지지 결여 ⑤ 개화당의 민비와 청군의 연락에 대한 감시의 소홀과 정변 수행 기술의 미숙 등을 들 수 있다.

4) 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은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 근대 한국의 민족운동이었다. 그것은 첫째, 세계사적으로 한국 민족이 개혁을 단행하기에 비교적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정열적으로 중세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한 첫 번째의 가장 적극적인 자주 근대화 운동이었다.
둘째, 한국 근대사에서 개화 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주었다. 갑신정변이 추구한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와 시민사회와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 문화와 자주적 근대 국방의 건설은 그 뒤 모든 개화 운동과 민족운동이 계승하여 추구한 것이었다.
셋째, 한국 민족의 반침략 독립운동에도 하나의 기원을 만들어 주었다. 갑신정변의 독립운동은 당시 중국의 조선속방화정책에 대한 과감한 저항의 형태를 가진 것이었지만 이 운동의 내부 성격은 모든 외세의 자주권 침해와 침략에 대한 저항과 독립의 추구가 본질을 이루고 있었다. 박은식(朴殷植)이 그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제1장을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로부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넷째,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형성과 발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운동이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그 뒤의 모든 민족주의 운동은 갑신정변을 계승하여 그것을 비판하고 반성한 위에서 발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