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서울역사문화포럼
제7회 심포지엄/박경룡
서울문화
2008. 8. 24. 11:47
제7회 서울문화사랑포럼 학술심포지엄 (2004년 1월 30일) 발표자 : 박 경 룡 서울문화의 특성과 의미 1. 서울의 의미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 아름다운 서울에서 / 서울에서 살렵니다’ 라는 <서울 찬가> 노래가 있다. 노래 가사처럼 꽃이 피고 새들이 지저귀는 서울은 아니지만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찾아온다. 여전히 바쁘고 복잡하고 정신없는 도시, 뛰지 않으면 택시나 버스를 타기 어려운 도시, 고층건물로 뒤덮인 도로에 가득히 넘쳐흐르는 자동차들만 기억되는 도시가 서울이 아닐까. 흔히 서울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서울깍쟁이’ 또는 ‘서울 양반‘이라고 한다. 서울깍쟁이란 말은 서울이 다른 지역에 비해 물가가 비쌌으므로 물건값 흥정에서 시비가 많이 붙어 유래된 것 같고, 사리가 밝은 것에서 비롯된 것 같다. 서울 양반이란 말은 서울에는 조선 500년 동안 벼슬을 사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자연 기품 있는 양반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이들이 어쩌다가 귀향하였을 때 굉장히 거드름을 피웠던 관계로 서울사람에 대해서 이와 같은 긍정적이나 부정적인 표현이 생겼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울지역은 민족문화의 발상지요, 한반도의 동맥이라 할 수 있는 한강을 포용하고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만큼 일찍부터 민족문화의 요람지이자 조선왕조 500년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만약 조선왕조를 인체(人體)에 비유하면 서울은 전 육체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뇌, 또는 심장에 해당할 것이다. 18세기 서구 문물이 밀려들어오면서 서울은 개화의 선구 역할을 담당하였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표현은 서울에서부터 바뀌어 갔다.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모든 고을의 으뜸이 된 ‘수선지지(首善之地)’로서 우리나라 최대의 궁궐도시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서울은 중앙문화의 터전으로서 국민문화의 중핵(中核)으로 인식되어 왔다. 특히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한 이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의 중앙집권적인 현상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지방문화의 종속화 · 침체화를 가속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이에 따라 중앙문화=고급문화라는 인식을 일반화 시켜 지방을 경시(輕視)하는 풍조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2. 형성과정과 문화의 맥락 서울문화의 뿌리는 멀리 선사시대로 소급된다. 백제가 500년 동안 도읍한 오래된 고도(古都)이기도 하다. ◈ 삼국 · 통일신라시대 .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왕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세웠다고 하는데, 위례성은 바로 서울의 한강 유역이다.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리토성, 송파구 방이동의 몽촌토성과 고분군, 석촌동의 적석총은 이곳이 백제의 초기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를 남쪽으로 몰아낸 뒤 한성을 남평양(南平壤)이라고 이름 지어 다스렸다. 이에 백제의 성왕은 신라와 함께 손을 잡고 551년 고구려를 북쪽으로 몰아내었다. 그러나 2년 뒤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고는 이 곳에 신주(新州)를 두고, 한양군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한강 유역은 줄곧 신라의 땅이 되었다. ◈ 고려시대 남경의 설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한양군은 양주(楊州)로 바뀌었다. 그러나 서울은 11세기 문종 때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남경(南京)이 되었다. 문종과 숙종은 남경에 궁궐을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1308년 충선왕 때 남경은 다시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어 행정의 중심지가 아니라 왕의 휴양지나 사냥터로만 주목되었다.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한양부는 고려말 공민왕에 의해 다시 새로운 도읍의 적격지로 떠올라 궁궐까지 짓고 우왕과 공양왕은 이곳에 6개월간 머물기도 하였다. ◈ 조선시대 가. 조선건국과 한양천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8월에 새로운 도읍지로 한양을 결정하고 음력 10월 28일에 천도하였다. 1395년 6월에는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한성부의 인구는 15세기 중엽 도성 안의 경우 대략 10만 명을 헤아렸는데, 한적한 산과 들에 드문드문 집들이 모여 있던 성저십리 지역을 합하면 대략 11만 명 정도였다. 이러한 인구 규모는 당시 영국의 런던 인구의 두 배에 이르는 것으로서, 서울은 당시에도 세계적인 대도시였다. 나. 임진왜란 후의 복구 그 동안 공들여 완성해 놓은 서울은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주요 건물들이 대부분 불타버려 폐허가 되고 말았다. 10만여 명에 달했던 서울 인구는 임진왜란 직후에 4만 명 정도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러나 전란이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고, 광해군 때에 이르는 약 20년 동안 복구사업에 힘을 쏟은 결과 경복궁이 그대로 방치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 개항 · 대한제국기 가. 밀려오는 서양 문물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한 10여 년간 경복궁을 재건하는 등 왕실의 위엄을 보였으나 본격적인 변화는 1876년의 개항과 함께 찾아왔다. 1883년에는 한강변의 양화진으로 중국 상인들이 몰려들고, 1884년에는 용산에 외국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 후 용산과 성안에는 중국인․일본인․영국인․독일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밀려들어와 장사를 벌였다. 용산과 진고개(충무로)·명동에는 일본인이, 서소문·소공동·수표교 일대에는 중국인들이, 영국·미국·러시아 공사관이 들어서 있는 정동 일대에는 서양인들이 모여 살았다. 나. 새로운 문물이 바꿔놓은 삶 서구 문물이 도입되면서 시민들의 삶도 바뀌기 시작하였다. 1894년에는 본격적으로 서울 거리에 인력거가 등장하더니 1899년에는 서대문부터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전차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듬해에는 종로에서 남대문을 거쳐 용산에 이르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고, 이 해에 철도도 놓였다. 1899년에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경인철도가 개통되었고 이듬해에는 한강철교가 준공되었다. 이어서 1905년엔 경부철도가 전구간 개통되고, 1906년에는 경의선이 개통되었다. 1888년에는 마포에서 인천을 오가는 증기선도 등장하였다. 그러나 철도의 개통으로 인해서 한강을 왕래하는 뱃길은 점차 힘을 잃었다. 서울의 밤거리도 차츰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1897년에는 종로 거리에 석유로 불을 켜는 가로등이 설치되고 1900년에는 전기로 켜는 가로등이 설치되었으며, 일본인 거주지인 진고개(충무로) 일대에 가정용 전등이 시설되었다. 1908년에는 상수도 설비가 완공되었다. 한강에서 물을 끌어들여 뚝섬에서 깨끗하게 처리된 물은 성안과 용산 일대에 공급되었다. ◈ 일제침략기 1910년에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탈바꿈했고, 한성부는 경기도 경성부(京城府)로 바뀌었다. 서울은 이제 한 나라의 도읍이 아니라 경기도의 일개 부(府)로 강등되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변경으로 서울의 외곽지역들이 경기도에 편입되어 거의 7, 8분의 1로 줄어들었으나 20여 년 후인 1936년에는 고양군, 시흥군, 김포군의 지역이 경성부로 편입되어 다시 서울의 총면적은 약 140㎢가 되었다. 이는 예전에 비해 거의 4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었으나 처음과 비교하면 여전히 절반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서울의 인구는 급격히 늘기 시작하여 경술국치 후 불과 3년 만인 1913년에는 32만 명을 육박하였다. 1942년 서울 인구는 100만 명 선을 넘어서 110만 명에 달하였으나 광복 무렵의 서울의 인구는 100만 명 내외였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 광복과 한국 전쟁 가. 행정체제의 개편 일본어로 ‘게이죠(京城)’라고 불리던 서울은 광복 이듬해에 ‘서울’을 공식 명칭으로 부여받았다. 또한 경성부는 경기도 관할 하에서 벗어나 서울시로 다시 태어났으며, 3년 뒤 1949년 8월 15일에 서울시는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어 수도 서울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나. 서울의 변모 광복 직전에 90만 명 내지 100만 명 정도였던 서울 인구는 해방과 함께 해외 동포가 귀국하고 북쪽 주민들이 월남하면서 급격히 늘어났다. 1946년에 이미 130만 명에 육박했고, 한국 전쟁 직전에는 170만에 이르렀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피난하여 서울 인구는 6, 70만 명 수준으로 떨어졌으나 1953년 휴전과 함께 120만 명을 넘어섰고, 1957년에는 151만 명에 달해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하였다. 1959년에는 200만 명을 넘어서 서울은 이미 만원이 되기 시작하였다. ◈ 산업화와 근대화 가. 현대도시로의 발돋움 1960년대부터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되면서 서울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산업화의 핵심지대가 되었다. 인구도 크게 불어나고 개발과 산업발전이 추진되면서 그 불빛 아래 도시빈민의 그림자도 만들어진 시기였다. 농촌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왔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지상 1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이 서울 시내에 세워지기 시작하여 이제 서울은 빌딩 숲으로 이루어진 현대적인 도시가 되었다. 나. 1970년대 강남개발 1974년에는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어 교통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시민의 삶도 크게 변하였다. 지하철과 함께 1970년대 이후로는 거의 해마다 한강에 대교가 건설되어 서울 남쪽과 북쪽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1960년대 말에는 여의도 개발이 시작되어 1970년대 초에 마무리되자 도심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강남개발이 시작되었다. 지하철의 개통과 한강대교의 건설, 여의도의 개발이 강남의 성장과 개발을 재촉한 것이다. 이제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북과 강남의 인구가 거의 비슷할 정도로, 강남은 불과 몇 년 사이에 번화가로 성장하였다. ◈ 거대도시 서울 가. 미래를 만드는 도시, 서울 1982년에 한강종합개발이 시작되어 1986년에 마무리되었다. 몇 차례의 관할구역 확장, 구의 신설로 인해 서울특별시는 현재 총 25개 구, 530개 행정동을 거느린 초대형 도시로 성장하였다. 면적은 2003년 현재 약 600㎢로서 광복 당시에 비해 약 4.5배로 늘어났다. 1988년에 서울 인구는 비로소 1천만을 돌파했고, 1992년에 1,100만 명에 근접했다가 점차 감소 추세에 접어들어 2003년 현재 1,020만 명 정도가 되었다. 한강의 기적을 낳은 서울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이어 2002년에는 월드컵 개최 도시가 되었다. 이제 수도 서울은 세계가 주목하는 국제도시로 발돋움하였다. 도시 인구의 팽창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점은 고양, 부천, 성남, 광명시 등의 위성도시 발달로 인해 어느 정도 해결되었고, 빽빽한 빌딩 숲과 거미줄 같은 도로망, 서울 남북을 연결하는 한강 다리는 바쁘게 돌아가면서 빠르게 성장하는 서울의 일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서울은 과거의 도시가 아니라 경제적 풍요로움, 쾌적한 환경, 균형 잡힌 발전을 향해 21세기의 도약을 준비하는 미래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3. 연구 성과 및 과제 서울 지역은 중앙문화의 터전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향토사나 향토문화 또는 지방문화와는 차별화되고 대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역사 문화의 성격으로 수도 서울의 그 의미와 중요성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세계적인 고도(古都)이자 문화도시인 서울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이나 지역적 특성을 도외시하고 향토문화를 논의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중앙문화를 대표하는 서울이 현대화할수록 그 역사성이나 유물, 유적은 점차 사라져가고 말 것이니 서울의 역사문화에 대한 연구와 탐구는 현대화 · 산업화에 비례하여 더욱 활발히 진행해야 한다는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오늘날 전국 각 지방의 경우처럼 1950년대부터 향토애와 열의를 지닌 향토문화학자들, 그리고 문화애호가들에 의해 자생적인 연구단체가 결성되어 연구지의 간행과 문화유적 답사, 유물 유적의 발굴조사 등의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서울은 그간 서울시의 문화과 · 문화재과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 서울학연구소 등 관주도(官主導)로 서울 역사문화를 연구하고 편찬사업을 벌여왔다. 2001년에 서울역사박물관이 개관하고 서울시 25개구에 23개 문화원이 설립되어 있다. 1986년에 서울문화사학회, 1990년대 초에 서대문향토사연구회가 발족되어 순수 시민연구단체로서 활동을 해오고 있으나 회원들의 회비와 미미한 지원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서울의 역사 민속 · 생활환경 등의 지역적 특성과 문화의 연구성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궁극적으로 한 지역사회의 문화 발전은 지역주민들이 자기 고장을 가꾸고 사랑하려는 향토애와 자긍심을 소유할 때 가능하므로 이를 위해서는 자기 고장의 역사와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시키고 자각케 하는 운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