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강에 좋은 여가생활 중 등산만큼 실속 있는 것이 있을까! 서울에는 도심 한복판에도 크고 작은 산들이 많아서 시민들이 주말은 물론 주중에도 즐겨 찾는 편이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거나 연로하여 산행이 쉽지 않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곳이 있다. 성곽답사다. 무리하지 않고 성곽 주변의 삼림을 즐길 수도 있지만,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단순한 자연과의 합일 그 이상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따라 걷는 부활의 길이요, 순교의 길이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미완의 길이다. 산행 도중 다리를 다친 적이 있어서 등산을 꺼려하던 차에 권유받은 서울성곽 답사는 새로운 활력을 주는 계기가 됐다.
동대문역사관에서는 성인 대상 답사 프로그램 '동대문 주변 서울 성곽 둘러보기'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날 탐방코스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에 위치한 동대문역사관의 이간수문에서 출발하여 동대문, 낙산공원을 거쳐 혜화문에서 마무리하는 코스다. 우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대해서 소상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역은 2009년 10월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된 자리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문을 열게 돼, 역 이름을 동대문운동장역에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변경 고시하였고, 12월 1일부터 바뀐 역명을 사용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9글자 역명이라고 한다. 기존의 동대문운동장역과 동일한 역인 줄 모르고,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나섰다는 일행들도 있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1번 출구로 나온 일행들은 동대문 역사관, 동대문운동장 기념관 등 동대문의 변모에 눈이 휘둥그레져 자리를 뜨지 않고 다양한 볼거리를 구경하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오면 동대문역사관(www.museum.seoul.kr) 이나 인근 청계천문화관(http://www.cgcm.go.kr)의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얻어서 좋은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고,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는 다양한 행사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문화해설사인 신성덕 시민기자의 ‘역사 따라 3시간’의 답사 내용이다.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마치 대학의 역사학 시간 같았다. 크게 서울성곽 축성, 이간수문, 오간수문, 흥인지문, 낙산, 혜화문에 대한 것이다.
서울성곽은 사적 제10호로 조선 500년 동안 동대문, 숙정문, 서대문, 남대문 등의 4대문과 홍화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 등의 4소문에 이어져 서울 장안을 지키던 울타리다. 서울의 4산인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잇고 있는데 그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다. 서울성곽은 조선 태조 때 쌓은 것을 세종 때 크게 개축했으며, 조선 후기 숙종 30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는데 그 뒤 영조 19년에 부분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다. "태조 5년(1396)에는 비교적 작은 석재를 이용해 돌을 쌓았고 세종 4년(1422)에는 모가 둥글게 된 넓적하고 평평한 돌로 개축했고, 숙종 30년(1704)부터는 정방형으로 다듬은 석재로 벽돌 쌓듯이 빈틈없이 축조했다"고 한다. 돌의 모양과 색깔이 다른, 그리고 추운 겨울철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직선으로 쌓았다는 설명을 듣고 청년들은 모두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연해졌다.

2009년 10월 27일 옛 동대문운동장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일부가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개방된 구간은 공사를 완료한 서울성곽 동측 공원지역. 성곽이 발굴됐던 142m는 그대로 복원하고, 성곽이 멸실된 123m 구간은 지적도에 있는 추정 성곽선을 통해 흔적만 표시해 두었다. 특히 복원되는 142m의 성곽은 축성 당시의 기법에 따라 태조, 세종, 숙종 등 축조시기별로 달라지는 성곽모양을 그대로 되살렸으며, 도성 밖으로 물을 빼내기 위한 시설인 이간수문과 방어시설인 치성 등이 복원돼 눈길을 끈다. 오간수문지는 청계6가 사거리의 동편, 동대문에서 남으로 100m 지점에 위치한다. 다섯 칸으로 돼있어 ‘오간수다리’, ‘오간수문’이라 하였다.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르는데, 흥인지문에 대해서는 세종대 재학중인 신요셉 군이 풍수설을 중심으로 잘 설명해 주었다. 서울의 사대문 명칭을 유학의 5대 덕목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따서 붙인 관계로 동대문은 흥인지문이라는 공식명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은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쪽에 속하므로 ‘흥인’은 동방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지(之)자를 더한 것은 서울 지세가 북서쪽보다 동쪽이 낮으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낙산은 종로구 이화동, 동숭동, 창신동, 동대문구 신설동, 성북구 보문동, 삼선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낙타와 같아서 낙타산, 낙산이라고 하며, 조선시대 궁중에 우유를 공급하던 유우소(乳牛所)가 위치한 산이라 하여 타락산이라고도 불렸다. 2002년에 개원하면서 낙산전시관과 비우당 등을 복원하고, 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2.1km의 성곽을 따라 역사탐방로를 조성하였다. 공원 전망대에 서면 도봉산, 인왕산, 남산 등의 명산이 눈앞에 펼쳐지고 고층 빌딩 숲과 소박한 주택가까지도 한눈에 내려다 보여 참 정겹다.
혜화문은 서울성곽의 사소문 중 하나로, 혜화동 고개에 있는 동쪽의 작은 문이다. 태조 때에는 홍화문이라 했는데, 성종 14년(1483)에 건축한 창경궁의 정문을 홍화문으로 하여, 혼돈을 피하기 위해 중종6년(1511)에 혜화문으로 고쳤다. 이 문은 옛날에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고 관리나 군대만 통과할 수 있었고, 양주나 포천 더 나아가서는 강원도 함경도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었다고 한다. 문루 천장에 봉황을 그렸는데, 그것은 문밖의 농민들이 농사짓는 데 새의 피해가 커서 새의 왕인 봉황을 그려서 피해를 줄이려 했다는 것이다. 단청처럼 화려하게 그려진 천장의 봉황을 쳐다보는 순간은 마치 ‘전설 따라 삼천리’의 한 장면 같았다.
낙산공원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조선시대 청백리의 상징인 하정 유관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던 집에 지봉 이수광이 지은 정자 비우당(庇雨堂)이 있는데, 비우당 뒤편에는 정순왕후의 일화지가 얽힌 자주동샘이 있다. 정순왕후가 궁중에서 쫓겨나 살 때, 남편 단종이 억울하게 죽은 영월쪽을 향해 날마다 명복을 빌며 옷감에 염색을 하여 근근히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 샘에 와서 비단 빨래를 하면 저절로 자주색 물감이 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비우당'은 조선시대 실학자인 지봉(芝峰) 이수광이 그의 저서 '지봉유설'을 지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귀갓길에 미처 들르지 못했던 곳에 대한 또 다른 정보를 얻게 돼, 산행이 어려운 뜨거운 여름철에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성곽 답사를 또다시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울에 살면서 서울에 무관심했고, 교과서에서 배운 현장이 바로 곁에서 손짓하고 있는데도 눈을 감고 살지는 않았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역사나들이, 이제야 눈이 떠진 것 같다는 젊은 청년들, 그들의 일기장도 분명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것이다.
시민기자/신성덕, 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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