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 2006. 8. 28. 10:10

사찰의 하루 (1)

나는 부처님과 함께 無로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몸에는 승복을 입었고 머리는 깎여져 있으며 정신은 언제나 맑기만 합니다.

 

우뚝한 생각이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善에 기울어지지 않고

 

끓어오르는 행동이 정당한 목표이므로 惡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지극히 고요하여 보고 듣는데 생각이 다 가라앉았고 파도치는

 

이 세상 삶속에서도 집착이라곤 없습니다.

오늘도 새벽 세 시에 잠을 깼습니다.

 

잠이 깨어지면 그 시간은 늘 새벽 세시입니다.

 

오랜 시간을 하루같이 습관들여 온 시간생활이니까요.

 

계오축시(鷄嗚丑時)라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새벽 세시를 말하는 것이지요. 꼬기오-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습니다.


눈을 뜨기 전이나 눈을 뜬 뒤에나 부처님의 얼굴은 같았습니다.

 

만약에 눈을 감고 잠잘 때 부처님 얼굴이 어두웠더라면

 

눈을 뜨고 잠을 깼을 때는 부처님 얼굴이 밝아졌겠지요.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부처님 얼굴이란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세 시 정각에는 은은하게 도량석 목탁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앞산에서도 뒷 구릉에서도 목탁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부슬비 내리는 봄날 초가집 지붕에 처마물 떨어지는 소리와도 같고

 

동네 외딴 곳에 있는 물레방아 방앗공이 떨어지는 소리와도 같습니다.

 

산토끼, 노루, 멧돼지 모두 다 잠에서 깨어나 하품도 하며

 

무심코 듣는 도량석 목탁소리입니다.

‘나무대비 관세음보살, 원아속지 일체법, 나무대비 관세음, 원아조득 지혜안…’

 

“내 자신을 각성하자. 찰나찰나를 놓치지 않고 영원히 이어져 가는

 

내 자신을 각성하자. 이 영원한 내 자신을 각성할 수 있는

 

지혜의 힘을 얻어내자. 믿음의 힘을 얻어내자.” 목탁소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각성해서 살아가는 것은 기쁨이다. 각성해서 살아가는 것은 행복이다.

 

비록 어렵고 죽음의 길에 당하더라도 방황하는 고뇌의 길을

 

여읜 것이기 때문에 담담한 즐거움은 끊어지지 않는다.’

이윽고 목탁소리는 종소리에 바톤을 넘겨줍니다.

우렁찬 종소리! 하늘을 흔들고 땅을 뒤집고 물, 불이 다 무서워

 

달아나는 종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을 초월하게 하는 즉 삶과 죽음을 자재하게 하는

 

종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종소리 울리면 번뇌는 깨지고 깨달음 하나 둘 허공을 메운다.

 

욕심을 벗어나 고집을 떠나서 부처님 마음에 오가자 너와 나”

 

이렇게 종소리는 외칩니다.

 

하늘 천상 33천 제일 높은 곳 비상비비상천에서 저 18지옥의 끝

 

무간지옥까지 울리는 종소리! 이 종소리는 누구에게든지

 

삼계 우주(三界 宇宙)를 탈탈 털고 벗어나 자유자재한 부처님 마음에

 

오고 가게 해줍니다.

 

욕심만 벗어나면 고집만 떼어버리면 바로 거기가 부처님 세계니까요.

 

억지로라도 괜찮아요. 강제로라도 고집을 못부리게 된다면,

 

즉 부처님의 나라의 멋을 보게 됩니다.

 

사찰의 하루 (2)

옛날 어느 큰 절<총림(叢林)>에서

 

새벽에 치는 28번의 종소리를 듣고 있던 그 절 방장스님은

 

그 종소리가 유난히 우렁차고 한결같이 울려퍼지는데 놀라

 

아침 공양 후 종을 친 사람이 누구인지 불렀다.

 

불려온 사람은 13세 먹은 동자 사미승이었다.

 

너무나 어린 사미승이 쳤다는데 더욱 놀란 방장스님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오늘 새벽에 종을 칠 때 어떠한 마음으로 쳤느냐?” 했더니 대답하기를

 

“저는 몇 년 전부터 우리 마을 글방에 다녔습니다.

 

그때 글방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누구든지 종을 쳐야 할 때가 되면 반드시 그 종을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쳐야 한다. 부처님을 치는 마음,

 

즉 부처님이란 생각이 꽉찬 마음으로 친다면 종소리는

 

부처님의 음성이 되느니라’하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 종을 치면서 그와 같은 생각으로 쳤습니다.”

 

“오! 좋고 좋다. 한평생을 두고 잊어버리지 말아라.”하였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부처님’하고 생각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마음이 된다는 것은 무아(無我)가 된다는 말입니다.

 

무심(無心)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무사(無私)가 된다는 뜻이지요.

 

지금 이 세상 20세기 시대에는 무사인(無私人)은 필요없을까요?

 

또 우리는 무사인(無私人)이 되어 볼 생각이 안날까요?

 

더욱이 우리 대한민국에 이 무사인(無私人)이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보다도 우리 불교계에 이 투철한 무사인(無私人)이 많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불교계나 대한민국국민은 모두 다

 

무사공정(無私公正)한 생활을 하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아직도 저 아랫배 단전에서 무사공정(無私公正)한 양심(良心)의 외침이

 

솟아 오르기를 모든 사람들은 기다리지 않을까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짓는다.

 

다시 말해서 산이라고 마음을 지었기에 산이고 물이라고

 

마음을 지었기에 물이요, 부처님이라고 마음을 지으면 부처님이요,

 

중생이라고 마음을 지으면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마음이 아무 것도 짓는 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란 어떠한 것이기에 스스로 짓는대로 무엇이든지 된단 말일까요?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찾아보기 어려워라.

 

크기로 말한다면 허공보다 더 크고 작기로 말한다면 터럭보다 더 작으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니 가히 불가사의로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음이요, 진심(眞心)입니다.

이 진심(眞心)이 되었을 때 사심(私心)은 없어지고

 

무아(無我)가 된다는 것이지요.

 

무사공정(無私公正)한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하고 생각하는데서(念佛) 탄생되니

 

이 ‘부처님’하고 생각하는 것이 그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래서 나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이

 

즉 부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종소리가 끝나면 그 바톤을 예불(禮佛)에게 넘겨 줍니다.

 

오! 부처님께 절하는 것 그것은 참으로 기쁘고 즐겁고 반가운 일입니다.

먼저 부처님 앞에 향을 피우고 촛불을 켭니다.

 

“부처님, 부처님, 우리는 부처님 앞에 계(戒)를 지키는 향을 피웁니다.”

 

“부처님, 우리는 부처님 앞에 마음의 안정을 이루겠다는 향을 피웁니다.”

"부처님, 우리는 부처님의 지혜를 얻으려는 향을 피웁니다.”

 

“부처님, 우리는 이 세상 탐, 진, 치에서 벗어나려는 향을 피웁니다.”

 

“부처님, 우리는 이 세상 탐, 진, 치를 벗어나서 모든 좋은 하려는 향을 피웁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향을 피우고 “부처님, 우리는 마음의 촛불을 켭니다.

 

깨달음의 촛불을 켭니다.”하고 부처님을 우러러 일심(一心)에 젖습니다.

그리고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至心歸命禮 三界導師 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내 머리가 땅 속으로 꺼지게 절을 합니다.

 

“貪(탐), 瞋(진), 痴(치)가 험악한 인생행로(人生行路)에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시고 또 태(胎), 난(卵), 습(濕), 화(化)로 태어나는

 

모든 유정물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우리는

 

목숨을 다 의지하여 절합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행로는 번뇌에 싸여 있고 불안과 방황이 내포되어 있어

 

늘 안전장치와 보호장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 안전과 보호는 ‘깨우침’이 해결해 주는 것이지요.

 

깨우침으로서만이 스스로 안전해지고 서로 보호해 주는 것이지요.

 

이 깨우침에게 내 목숨을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깨우침에 완전한 성취를 이룩한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

 

즉 능인적묵(能仁寂默, 능히 어질고 고용한 마음)

 

여기에 우리는 절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지요.

 

내 스승으로 삼고 싶어서 삼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제일 훌륭한 스승을 만난 사람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깨우침, 능인적묵에게 절을 하면 번뇌와 불안과 방황은

 

어느새 다 가셔지고 가을 하늘처럼 맑고 맑은 낮과 같이 깨끗하고

 

편안하고 분명한 마음의 인생행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또 절을 하고 또 하고…

 

즐거운 인생행로 자유와 평화의 인생행로는 예불에서부터 펼쳐집니다.

이젠 참선으로 들어갑니다.

 

벌써 날이 새고 햇살이 나뭇가지의 사이사이에까지 고루 퍼진 아침 시간입니다.

 

참선(參禪) 목탁이 울리고 이어서 입선(入禪), 죽비 소리가 세번 울려집니다.


오! 산하대지(山河大地), 우주만물(宇宙萬物)은 다 공(空)한 것입니다.

 

물론 나의 몸, 마음, 허공도 죄다 본래공(本來空)입니다.

 

본래공이란 본자연(本自然)이란 뜻도 됩니다.

 

삼라만상 대자연 그대로란 뜻이지요.

 

그러니까 내 몸과 마음이 대자연 그대로의 상태라는 말입니다.

 

하나도 ‘내 몸’ ‘내 마음’ 이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럼 무엇이 있느냐? ‘성성적적(惺惺寂寂)’이 있을 뿐입니다.

 

깨끗깨끗하고 고요고요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일어서고 앉고 말하고 잠자는데 늘 성성적적하다는 것이지요.

 

“따뜻한 봄날에 산들 바람이

 

지나가는 암소가 흘리는 침을

 

十里고 二十里고 끌어 날리니

 

제주 돌 하루방이 뭇음을 짓네”

멀고 먼 옛날 중국 조주 땅에 조주스님이 계셨습니다.

 

이 스님은 조주 고불(古佛)이라고 불리우는 부처님처럼 훌륭한 스님이었지요.

 

하루는 젊은 스님이 한 사람 찾아와서 지나가는 개를 보고 조주스님께 물었습니다.

 

“저 개도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소지(素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께서는 “없다” 했어요.

 

젊은 스님은 깜짝 놀라서 “부처님 말씀에는 유정무정이 다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조주스님은 없다고 하실까?”

 

의정(疑情)이 났어요.

 

의정이 안날 수 없지 뭡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믿고 살아갑니다.

 

동시에 부처님이 인가하신 부처님 제자도 부처님과 꼭 같이 믿습니다.

 

그러니까 조주스님이 왜 없다고 하셨는지 의정이 안날 수 없고 끊어질 수 없습니다.

부처님을 꼭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한낱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지나칠지 모르지만 부처님 말씀을 꼭 믿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그냥 지나쳐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 가는데 먹고 입는 것이 더 소중합니까,

 

부처님 말씀이 더 소중합니까?

 

만약에 먹고 입는 것이 더 소중하다면 의정은 얼마 안가서 사그라질 것이고

 

부처님 말씀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의정이 큰 덩어리처럼 일어나

 

일상생활 속에서 타오를 것입니다.

 

사실인즉 부처님 말씀이 우리의 먹고 입은 생활보다는 더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은 우리의 먹고 입는 생활을

 

바르게 해주기 위한 말씀이니까요.

 

그래서 의정의 불덩어리 즉 성성적적의 불덩어리가

 

우리의 먹고 입고 하는 생활을 지배하게 됩니다.

 

깨어 있고(惺), 고요한(寂)한 마음이 우리의 먹고 입는 생활을 지배한다는 말입니다.

 

오! 이러한 생활을 누가 맛보았습니까. 또 누가 맛보려 하지 않을까요?

“종일토록 앉아서 졸고만 있던

 

옛날의 한가한 대머리 스님

 

옛날의 한가한 대머리 스님은

 

종일토록 앉아서 졸기만 한다.”

 

사찰의 하루 (3)

깨끗하고 고요한 마음이 우리의 생활자세일 때 우리의 생활은

 

대머리 스님같이 한가롭게 되었지요.

 

그래서 순치황제(順治皇帝)가 게송을 읊어 말하기를

“백년삼만육천일 불여승가반일한이라

 

(百年參萬六千日 不如僧家半日閑, 속가에서 백년을 살아도

 

절에서 한나절 한가하게 산 것만큼 못하다).”고 했습니다.

대머리 스님이 졸다가 보니 사시공양 시간이 되었습니다.

 

옛날부터 부처님께서는 하루 한 때 사시공양만 드셨습니다.

 

우리는 위성도업 응수차식(爲成道業 應受此食)으로 수도를 성취하기 위하여

 

이 사시(9시~11시) 공양 즉 법공양을 하는 것입니다.

법공양이란 선열(禪悅)이 밥이 되고 법희(法喜)로 배불린다는 것이지요.

 

참선하는 기쁨을 밥으로 삼는다는 것은 샘물이 저절로 끝없이 솟아 오르듯이

 

이 참선하는 기쁨이 자나 깨나 늘 솟아 오른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항상 솟아 오르는가? 번민이 사그라진 곳이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랴!

소소역역(昭昭歷歷)하게 자신의 생활상이 거울에 나타나니

 

또한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래서 옛사람들이 읊어 가로대

 

“수지왕사 일륜월, 만고광명 장불멸

 

(誰知王舍 一輪月, 萬古光明 長不滅, 누가 부처님이 계시던 왕사성의 둥그런 달이

 

만고에 꺼지지 않는 광명인 것을 알겠는가?)"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조주스님 말씀을 하나 더 할까요.

 

어느날 조주스님은 또 젊은 스님에게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스님, 스님은 이 세상에서 참으로 높은 어른으로 대접을 받고 계십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스님도 우리와 같이 밥을 먹을 때 밥 잡수시고

 

일할 때 일하시고 그러는데 도대체 우리하고 무엇이 다릅니까?”

 

“그럼 너희들은 밥 먹을 때 밥 먹는 생각만 하느냐?”

 

“저희들은 법 먹을 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합니다.”

 

“나는 밥 먹을 때 밥 먹는 생각만 한다.

 

설사 이런 저런 생각을 낸다 하더라도 밥 먹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떠나지 않는다.

 

마치 물 위에 물거품이 생길 때 물을 떠나서 물거품이 생겼더냐?”

 

젊은 스님은 깨달아 알아 들었습니다.

 

자동차에 기름을 넣고 엔진을 돌려 운전하듯이 우리 몸뚱이에

 

밥과 국을 넣으면 그것이 소화되는 열기로 인해서 몸이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지요.

 

또 모범 운전기사가 차를 잘 운전하는 것과 같이 정상적인 마음,

 

깨달은 마음이라야 몸을 잘 행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정상적인 마음, 깨달은 마음이 우리의 몸뚱이에 밥과 국을 넣어서

 

이 몸이 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법공양입니다.

 

그래서 영가 스님께서는 이러한 노래를 불렀지요.

“몸뚱이를 떨어지게 객관시 하라

 

그 가운데 먹고 마심이 순조롭네

 

먹고 마심 모든 것이 공한 것이라

 

이것이 부처님네 원각(圓覺)이란다”

법공양 다음에는 오후(午後) 참선입니다.

참선에 오전 오후가 어디 있느냐고요?

 

물론 없어요. 없고 말고요. 참선한다는 것도 없는데

 

무슨 오전 오후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오후 참선이라는 것은 자못 이렇다 하는 것 뿐입니다.

 

불어삼계 현신의(不於三界 聯身意) 즉 탐, 진, 치에

 

몸과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즉 중생과 꼭 같은 행동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행 보살행을 지향(指向)하면서 말이지요.

 

어려운 것 같지만 깨달으면 아무일도 아닌 것이지요.

 

쉬운 것 같지만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아직도 할 이야기는 끝이 없이 많은데 어찌하랴 잠도 자야지요.

 

잠잘 시간을 알려주는 큰 종소리가 세 번 울려옵니다. 밤 9시-

“야야 포불면(夜夜抱佛眠) 조조 환공기(朝朝還共起)

 

기좌 진상수(起坐鎭相隨) 어묵 동거지(語默同居止)

 

섬호 불상리(纖毫不相離) 여신 영상사(如身影相사)

 

욕식 불거처(欲識不去處) 지저 어성시(只這語聲是)”

밤마다 밤마다 부처님을 보듬어 안고 자고

 

아침마다 아침마다 또한 같이 일어난다.

 

일어서고 앉고 하는데 참으로 서로 따르며,

 

말하고 잠자는데 함께 살아간다.

 

터럭 끝 만큼도 서로 떠나가지 않는 것이

 

마치 몸과 그림자 같은 사이로구나.

 

그대가 만약 가지 않는 곳을 말고자 하면

 

자못 너의 말소리 나는 것 바로 이것이니라.

 

돌 또 돌돌.

 

~~~~~~~~~~~~~~~~~진휴 스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