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과무아

Ⅱ.諸思想과 業의關聯性 考察
2. 業과 無我
불교는 인간(人間)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인간을 주관적(主觀的)으로 말하면 '나'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나'라고 하는 그 '나'는 어떤 것을 가리킬까. 십이처설(十二處說)에서 말하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六根)을 말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나를 탐구해 들어간다면 오취온(五趣蘊)에 이른다고 말할 수가 있다. "사문이나 바라문이 '나'의 실체를 헤아린 다면 그것은 모두가 오취온에서 그런다."1)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육근(六根)이나 오취온(五趣蘊)이 그렇게 나라고 할 만한 것들일까. 먼저 인간의 나라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어야 하는가에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상일성(常一性)을 가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심신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나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요 생명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바라문의 사상가들은 일찍부터 나의 이런 불변성에 착안하여 그것을 우주의 본질인 범(梵)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說)에까지 심화시켜 갔던 것은 누차 언급한 바와 같다. 이러한 나를 그들은 '아트만(atman 自我)'이라고 불렀다.
내가 지녀야 할 또 하나의 성질은 주재성(主宰性)이다. '남'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내 자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남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나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주재성(主宰性)이 있어 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이나 오취온에 그러한 상일(常一)․주재성(主宰性)이 있을까. 그들이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은 앞서 충분히 살펴보았다.
무상함은 상일성(常一性) 이 없기 때문이고, 괴로움은 주재성(主宰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결코 '나의 실체(實體)'라고는 못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아설은 불교의 본질이자 원의(原義)를 대변하고 윤회설(輪廻說)은 대중구제(大衆救濟)의 방편으로서 설시(說示)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계신다. "눈이 만일 나라면 핍박의 괴로움을 받을 까닭이 없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할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눈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핍박의 괴로움을 받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할 수가 없다. 귀․코․혀․몸․의지 또한 그와 같다."2)다음과 같은 말도 경전에 자주 반복되고 있다. "색(色)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오,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오(非我), 나의 것(我所)이 아니다."
붓다는 그의 제자들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자주 교환하고 계신다. "색은 무상한가 아닌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닌가?"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오, 이것이 나요, 이것은 나의 실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없을 까?" "말할 수가 없습니다." " 수(受)․상(想)․행(行)․식(識) 또한 그러하다."3)
우리들이 나라고 하는 것들(六根․四大․五取蘊)은 이렇게 나가 아니고(非我) 나의 것이 아니다(非我所). 그런 곳에 상일(常一)․주재성(主宰性)을 띤 나의 실체는 없다(無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범부들은 그런 것들을 나의 실체(實體)로 집착하고, 그런 아집(我執)으로 말미암아 대립, 분열 등의 괴로운 문제를 발생시키고, 덧없이 자기파멸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자아(自我)를 탐구한다는 바라문이나 사문들도 아직 진정한 자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른 경계는 오취온(五趣蘊)의 차원(次元)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붓다는 범부들의 아집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바라문이나 사문들의 철저치 못한 자아관(自我觀)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관찰에 이어, '그러므로 일체는 무아(無我)'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계시는 것이다.
불교의 현실판단은 무아설(無我說)에 이르러 일단락을 이루는데, 이것은 인도 정통파 철학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아트만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무아설(無我說)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입장으로서 인도철학사상(印度哲學思想) 이채를 띤 사상이라고 평가됨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이 무아설(無我說)에 대해 나의 절대적인 부정이나 참다운 나의 탐구를 배격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오해가 발생할 수가 있으니, 붓다의 재세시에 벌써 그런 예를 볼 수가 있다.
"만일 일체법(一切法)이 무아요 일체행(一切行)이 공적(空寂)하다면, 그 중에 어떤 나 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4) 나가 없다는 것이 불가하다는 견해이다.
불교(佛敎)의 무아설(無我說)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게 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러한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것이다.
무아설(無我說)의 목적이 이렇게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그 참다운 나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이 문제를 위해 우리는 불교에서 설하는, 일체법(一切法)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다시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윤회(輪廻)의 무아(無我)와 자아(自我)는<불교에서 영혼과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윤회를 인정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불교윤회설의 의의는 자기의 행위인 업의 전환을 통해 자기 개조가 가능함을 세속의 통념으로써 자각하게 하는데 있다. 즉 인간은[자기]를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떠한 존재로서의 [자기]를 지향해야 바람직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윤회설의 취지>다.
윤회설(輪廻說)과 무아설(無我說)은 상충하는 교설이 아니라 ꡐ범부(凡夫)의 나ꡑ에 의한 전생(轉生)과 수행자가 지향하는ꡐ각자(覺者)의 나ꡑ5)때문이다.
불교의 무아설 교설은, <무아설이 비아(非我)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이 비아적(非我的) 표현도 결국은 무아설의 범주 안에 있으며, 그것은 별개의 비아설로서가 아니라 무아설의 일환으로서 구사된 것ꡓ이라고 말한다. 이 비아적 표현은 형이상적인 문제에 대해 단정적인 대답을 기피했던 무기(無記)와 상통하는데 이 무기의 이면에 있는 자각내용은 연기(緣起)와 중도(中道)이다.
또 유식학(唯識學)에서 제시하는 <아뢰야식>이 불교사상사에서 무아설(無我說)과 윤회설(輪廻說)의 상충(相沖)을 해소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그 의의(意義)와 가치가 정립(定立)되어야 한다는 제안을 한다.
알뢰야식은 업의 잠재력인 습기(習氣)이며 이는 무아적(無我的) 존재(存在)인데 이 알라야식 자체의 양면적 기능과 이해(理解)의 가능성은 그대로 무아(無我)와 윤회(輪廻)의 양립을 반영한다. 무아설(無我說) 해석의 전통에서 중도적 위치에 있다고 설명한다.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이자 해탈의 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무아 윤회의 의미를 과학적 용어를 이용해 <아트만이라는 생식 세포에 의해서만 윤회라는 복제가 가능하다는 고정 관념, 즉 유아(有我)윤회를 깨뜨리고 업이라는 체세포 DNA에 의해 윤회라는 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아윤회이다>라고 설명했다.
무아윤회(無我輪廻)는 업(業)의 자기복제, 체세포에 의한 복제는 업이 타력에 의해 복제되는 ꡐ업(業)의 의타(依他)복제ꡑ라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이 '비아(非我)'라는 표현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에서, 자아(自我)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시각을 원전의 문맥에 따라 재검토한다.
이에 의하면 범부(凡夫)가 보는 현상 세계의 해명에 초점을 둘 때는 아(我)의 존재가 상정되어 있지만, 그런 세계의 극복에 초점을 둘 때는 아(我)를 부정하는 무아(無我)를 설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아(我)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비아적(非我的) 표현은 '아(我)의 존재(存在)가 가짜로 구상되어 있는 윤회적(輪廻的) 생존(生存)'임을 시사한다. 이 사실을 바른 지혜로 여실히 관찰할 때, '모든 것에는 아(我)가 없음'(諸法無我)를 깨닫게 되고 더 이상 윤회(輪廻)에 빠지지 않는다.
무아(無我)는 사상적(思想的)으로 구별되어야 할 대립적 사고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무아(無我)라는 부정적인 언급은 긍정적인 말로는 아무래도 충분히 묘사하기 어려운 열반(涅槃)의 초세간적이고 형언할 수 없는 성격을 강조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