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心銘(사상과 명언)/불교교리와 불교문화

무쇠소는 사자후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취모검,미묘한작용,언어 밖에서

서울문화 2007. 12. 12. 11:23
무쇠소는 사자후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취모검(吹毛劍)

취모검(吹毛劍) 

취모검을 뽑아드니

그 집 가풍 미묘하고 기이하고 또 절묘하다.

일천 성현들의 경계 밖에서 소요 자재하는데

달빛에 비친 갈대꽃이 눈처럼 새하얗다.

提起吹毛利  家風妙奇絶

제기취모리    가풍묘기절

逍遙千聖外  月映蘆花雪

소요천성외    월영로화설

- 태고(太古)

 이 글은 태고(太古, 1301~1382) 스님이 문수보살을 찬탄한 게송이라고 한다. 문수보살은 일찍이 일천 부처님의 스승이라고 알려져 있어서 유명한 수행도량에는 반드시 문수보살이 화현한다.  우리나라의 지리산 칠불사도 문수도량이라 하여, 일찍이 화현한 문수동자가 하동군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신통을 보여 얕잡아 보던 스님들을 달리 보게 하였다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강원도 오대산도 문수도량이다. 그곳에도 문수보살이 화현하여 불치병에 걸려 고생하던 세조대왕과의 설화가 있다. 중국의 오대산도 문수도량이다. 무착 선사와의 대화는 유명하다.그러나 문수보살은 설화의 주제가 되는 것이 본래의 사명이 아니다. 불법의 고준한 지혜를 상징한다. 그 지혜에는 어느 누구도 당할 자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롭다는 칼이 있다. 머리카락을 칼날 위에 올려놓으면 저절로 잘려나간다. 이것이 취모검의 날카로움이다. 문수의 지혜는 비유하면 그와 같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지혜를 활용하는 가풍은 미묘하고 기이하고 절묘하다. 일천 성현들이 따를 수 없다. 천 불, 만 조사들도 넘보지 못한다. 그들을 따돌리고 훌쩍 뛰어넘어 있다. ‘소요자재 유유자적’이라는 말로도 그 표현이 미치지 못한다. 달빛이 환하게 비쳐 갈대꽃이 새하얀 눈처럼 나부낀다고나 할까. 간결, 소박, 고고, 정적, 탈속, 유현의 극치다. 이것이 태고 스님의 선기(禪機)로써 문수보살의 지혜를 가능해본 시다.

무쇠소는 사자후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미묘한 작용

미묘한 작용

고요히 앉은 곳에서는 차를 반나절이나 마셨어도

그 향기는 여전히 처음 같고,

미묘한 작용을 하는 때에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더라.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정좌처차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


- 황산곡

  이 글은 송나라 때의 시인이며 화가인 황산곡(黃山谷, 1045~1105)이라는 사람의 글인데,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유명해졌다. 어디를 가나 많이 볼 수 있는 글 중의 하나다. 절에서나 세속에서나, 특히 차를 마시는 곳이거나 차를 판매하는 곳에서는 의례 이 글을 쓴 족자 하나씩은 보인다. 그만큼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구다. 아마도 우리들의 삶이 잘 표현되었으며 특히 아름답게 표현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사람의 삶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작용과 비(非)작용이다. 멈춤과 움직임이다. 있음과 없음, 보임과 보이지 않음, 언제나 그것의 반복이다. 어려운 말로 하면 체(體)와 용(用)이다. 또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이며 정적과 관조다. 줄여서 적(寂)과 조(照)라고도 한다.

 이러한 삶을 좀 더 멋있게 표현하면, 철저하게 고요하여 그 고요함이 극에 이르면 아침에 우려낸 차향기가 그대로 저녁까지 흩어지지 않고 응고되어 있다. 하루 종일 바람 한 점 없어서 차향이 그대로 있다. 얼마나 적정하면 그럴 수가 있는가. 이쯤이 되어야 고요히 앉았다고 할 수 있다. 몸도 마음도 철저하게 앉은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고요한 입장이 이와 같아야 한다. 그리고 작용이다. 움직임이다. 만물을 다 비춰보는 일이다. 그것을 미묘한 작용(作用)이라 한다. 작용이 아름답다. 작용이 있어야 사람이 사는 것 같다.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봄이 오고 새싹이 돋는다. 보고 듣고 울고 웃는다. 사랑하고 미워한다. 온갖 희로애락이 인간들의 삶의 바다에서 출렁인다. 이것이 사는 모습이다.

이 글에 대해서 별의별 해석이 다 있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이렇게 앉아보면 그렇게 해석이 된다. 세상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뜻으로 절에서는 시전(詩傳) 서전(書傳) 다 읽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앉아있어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아침의 차향은 그대로고, 눈을 돌려 산천을 바라보면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것이 마음에 들어온다. 이러한 삶이 선의(禪意)며 불의(佛意)의 삶이다.

 [무쇠소는 사자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언어 밖에서 찾다

 

언어 밖에서 찾다

아름다운 그 맵시,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리지 못하리니

깊고 깊은 규방에서 애만 태운다.

자주 자주 소옥을 부르지만 소옥에겐 일이 없고

오직 님께 제 소리를 알리려는 뜻이라네.

一段風光畵不成   洞房深處說愁情

일단풍광화불성     동방심처설수정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

빈호소옥원무사     지요단랑인득성

- 『소염시(小艶詩)』

  이 시는 그 유명한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애첩 양귀비(楊貴妃)와 안록산(安祿山)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 밖에서 다른 뜻이 있다는 의미를 찾아 선가에서 매우 빈번하게 인용하여, 깊고 오묘한 선의(禪意)를 언어 밖에서 찾기를 권하는 말로 잘 활용하고 있다. 소염(小艶)이란 처음 피려 할 때의 산뜻하고 아름다운 꽃송이를 뜻하는데, 양귀비를 일컬어서 하는 말이다.

   양귀비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의 한 사람이다. 양귀비는 현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러다가 안록산과 눈이 맞아 남몰래 자주 밀회를 하였다. 밀회를 할 때는 언제나 안록산을 부르는 신호로 자신의 몸종인 소옥(小玉)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안록산은 그 소리를 듣고 비밀통로의 문이 열려 있음을 알고 몰래 들어와서 만나곤 하였다.

   이 시를 선의(禪意)로써 해석하면 “아름다운 그 맵시,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리지 못하리니 깊고 깊은 규방에서 애만 태운다.”는 말은 선자(禪者)의 선경(禪境)을 의미한다. 그 도리를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다. 설명도 되지 않는다. 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경지이다. 깨달은 이의 저 깊은 마음속에 있는 정경이다. 표현할 길이 없고 알릴 길이 없어 답답하고 한스럽다. 터뜨리고 싶어서 몸살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도 보고 몽둥이를 휘둘러도 본다.

   임제 스님은 군인들의 막사에 재를 지내려고 갔다가, 보초를 서고 있는 졸병을 보고 법거량(法擧揚)을 한 적도 있다. 때로는 공양간에 가서 법을 거량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보고 법을 거량하기도 한다. 누구든 말만 걸어오면 일상적인 이야기에도 법을 거량한다.

   그러나 선자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그대로 따라가면 그것은 백발백중 어긋난다. 부처를 물었는데 ‘마른 똥 막대기’라고 하였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물었는데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였다. 또 개가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하였다. 불법의 대의를 물었는데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팬다. 이러한 선자들의 말이나 행위들은 그 뜻이 다른 데 있다. 마치 양귀비가 소옥을 부르는 것이 소옥에게 있지 않고 안록산에게 있는 것과 같다. 시에서 “자주 자주 소옥을 부르지만 소옥에겐 일이 없고 오직 님께 제 소리를 알리려는 뜻이라네.”라고 하였듯이.

   선은 그 뜻을 모르면 밀교의 진언이나 주문 이상으로 비밀스럽다. 깊고 유현한 것이 또한 선의 남다른 맛이기도 하다.

출처 : 무비 스님이 가려뽑은 명구 100선 ③  [무쇠소는 사자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