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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사랑포럼 남도1번지사적답사계획

서울문화 2008. 6. 10. 23:01
서울문화사랑포럼 남도1번지사적답사계획
2004년 4월24일(토)-25일(일)

- 일 정 -
4월24일(토) < 오 전 >
* 집결 : 지하철4호선 정부 과천청사역( 오전 9시 )
과천-> 안양, 군포 방향 ->(16번)시흥, 안산간고속도로->(안산IC)->서해안고속도로->서해대교->(서산휴게소 : 중식)

< 오 후 >
목포IC->(2번국도: 강진 방향)->(13번국도:해남방향)->(옥천, 우회전)->해남읍 해남읍 ->녹우단(綠雨壇 *윤선도 종가)->두륜산도립공원?대흥사(大興寺 *서산대사 사적)->해남읍->저녁식사(19:00 한성집) ->(18번국도 :해남 방향)-> (계리,좌회전)-> 813도로 -> (북평)->토말(21:00 땅끝마을)->숙박 (테마파크 061-535-1000)

4월25일(일) < 오 전 >
오전 5시 30분 기상(땅끝마을 전망대) 일출 구경->승선(1시간)->보길도->아침식사(07:00)->윤선도 관련사적(세연정 등) -> 승선-> 완도->완도대교-> 강진->다산초당(다산 정약용 귀양지)
< 오 후 >
(중식) -> 강진읍 -> 광주 ->호남고속도로 -> 논산 (논산~천안고속도로) -> 경부고속도로-> (반포IC)->지하철 2호선 강남역
(*교통은 카니발 1대,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조정. 일체 비용은 지출 후에 인원수로 정산, 분담함.)

해남윤씨 녹우단(海南尹氏綠雨壇)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사적 제167호. 조선 중기의 문신 윤선도(尹善道)의 고택(古宅)으로 전남 지방에 현존하는 주택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배치는 갑좌경향(甲坐庚向)으로 서향집이며 동4택(東四宅)에 속한다. 집터 뒤에는 덕음산을 두고, 앞에 안산(案山)으로 벼루봉과 그 바른쪽에 필봉이 자리잡고 있는 명당이다. 남동향으로 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이 되는데, 전면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고 서남쪽 담모퉁이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사랑채는 침방·사랑방·대청이 一자로 늘어서고 전면에 차양을 달았다. 사랑채의 침방 옆에는 작은 마루를 두고 그 뒤쪽에 곳간을 두어 안채의 부엌 칸과 연속시키고 있다. 사랑채 뒤 동쪽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되고, 안채가 ㄷ자형평면을 이루면서 자리잡고 있다.
서쪽으로 부엌·안방·작은대청을 일렬로 늘어놓고, ㄱ자로 꺾이어 큰대청을 두었다. 다시 ㄱ자로 꺾이면서 방·함실아궁이부엌·방·곳간을 두어 중문까지 연결시켰다. 부엌문을 나서면 안방 동북쪽으로 장독대·닭장·광들이 있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에 따로 쌓은 담장 속에 한 채가 있고 또, 담장 밖에 따로 고산사당과 어초은사당(漁樵隱祠堂)을 세웠다. 외측은 사랑마당 연못의 서쪽에, 내측은 외측으로부터 북쪽에 따로 떨어져 있다. 안채 뒤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진 후원이 있다. 솟을대문 앞쪽에는 노비집이 부엌과 방으로 ㄱ자평면을 이루면서 건축되어 있다.
이 주택의 구조는 민도리집 구조로, 안채는 화강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다. 가구(架構)는 4량으로 대들보를 두개의 고주에 걸고 이 대들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또 앞면의 평주와 고주 사이에는 퇴보를 걸었다. 도리는 납도리이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ㄷ자형평면의 양측에 합각을 만든 맞배지붕형이다.
특히, 건넌방 사이에 있는 함실아궁이부엌 위에는 한층 지붕을 높인 작은 덧지붕(솟을지붕)이 있다. 사랑채의 구조도 안채와 비슷하여 화강석으로 마무리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으나 전면 퇴주에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가구는 4량으로 안채의 가구와 같다.
다만, 사랑채 앞에는 차양이 건축된 바 이의 지붕을 만들기 위하여 사랑채 앞에 따로 기둥을 세우고 이 기둥과 사랑채 기둥 사이에 보를 걸고, 그 위에 작은 기둥을 세워 차양구조의 대들보를 얹고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대흥사(大興寺 : 해남군)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頭輪山)에 있는 절.‘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이 절은 426년(구이신왕 7) 신라의 정관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하여 만일암이라 하였고, 508년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善行比丘)가 중건하였다는 〈만일암고기〉의 기록과 514년(법흥왕 1)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하는 〈죽미기〉의 기록이 있다.
또 895년(헌강왕 11) 도선(道詵)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00사찰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하였는데, 대흥사도 그 중의 하나라는 설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았던 혜장(惠藏)은 이들 기록이 창건자의 활동시기로 볼 때 모두 신빙성이 없다고 보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사은(思隱)·성유(性柔) 등 세 승려의 부도(浮屠)가 있었다고 했는데, 이들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없으나 고려시대 승려이므로 대흥사가 고려 이전에 창건된 것은 확실하므로, 혜장이 주장한 신라 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에는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였다.
이 절이 크게 중창된 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대흥사를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라고 보고 자신의 의발(衣鉢)을 대둔산에 전할 것을 부촉(咐囑)한 임진왜란 뒤의 일이다. 1607년(선조 40) 해남의 외딴 곳에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배려에 의해서 이 절은 배불(排佛)의 강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그 뒤 1665년(현종 6)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1669년(현종 10)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으며, 1811년(순조 11) 천불전이 불타자 1813년 완호(玩虎)와 제성(濟醒)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흥사는 배불의 그늘 속에서 수많은 강사와 종사를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고승은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이다. 13대종사를 출생순으로 열거하면, 해동화엄종의 중흥조로 존경받았던 의심(義諶), 담론(談論)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던 삼우(三遇), 화엄(華嚴)의 도리와 백가(百家)에 통달했던 도안(道安),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칭송받았던 문신(文信),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가졌던 추붕(秋鵬),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회를 열었던 지안(志安)이 있다.
그리고 그 학문이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대우(大愚), 검소와 청빈의 생활로 평생을 살았던 회정(懷淨), 문자를 떠난 곳의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의 근원을 찾도록 가르쳤던 새봉(璽封), 대흥사의 정진당(精進堂)에서 늘 화엄법회를 열었던 체정(體淨), 인욕행이 남달리 뛰어났던 해원(海源), 대승경전에 통달하여 많은 저술을 후세에 남겼던 유일(有一),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이름난 의순(意恂) 등이다.
13대강사들은 모두가 제10대 대종사였던 체정의 문도로 원오(圓悟)·광열(廣悅)·영우(永愚)·승제(勝濟)·성규(聖奎)·정일(鼎馹)·태관(泰瓘)·행인(幸仁)·복혜(福慧)·윤우(尹佑)·시연(示演)·혜장(惠藏)·각안(覺岸) 등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대흥사의 옛모습은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북원은 대웅보전·나한전·시왕전(十王殿) 등 24개 소의 당우가 있었고, 남원은 극락전·대장전(大藏殿)·지장전 등 12개 소의 당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문제점이 있다. 대흥사의 현재의 사역(寺域)은 북원보다 남원이 훨씬 넓은데도 좁은 북원 쪽에 더 많은 당우가 집중적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흥사는 사지(寺址)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金塘川)의 냇물을 중심으로 가람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고, 지금도 남원·북원이라고 한다. 또, 남원·북원의 법당들은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별원(別院)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북원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군(一群)과 남원의 중앙부에 있는 천불전과 서산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한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草衣)가 중건했던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심으로 한 일곽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웅보전은 심수가 1665년(현종 6) 봄에 중건을 시작하여 1667년 가을에 완성한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이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인 이광사(李匡師)가 쓴 것이며,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목조삼존불과 광무연간에 조성된 후불탱화(後佛幀怜)를 비롯해서 감로탱화·삼장탱화·신중탱화·칠성탱화가 있다. 대웅전 앞에는 침계루(枕溪樓)가 냇가에 연이어 있고, 좌우에는 백설당(白雪堂)·세진당(洗塵堂)의 승사(僧舍)가 있다.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의 편액이 있으며, 이 건물은 현재 큰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웅보전 동편에는 응진전(應眞殿)이 있으며,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 앞에는 보물 제320호인 응진전전삼층석탑(應眞殿前三層石塔) 1기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라고 한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인 천불전은 1811년(순조 11) 불탄 뒤 1813년에 중건한 것으로, 내부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천불상은 옥돌로 만든 것으로, 완호 등 10인이 6년에 걸쳐 경주 옥돌로 조성하였다. 천불이 완성된 뒤 해로를 통하여 이 절로 옮기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일본에 닿게 되었으나, 일본인들의 꿈에 이 천불이 나타나서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둔사로 가는 중’이라 하여 다시 대흥사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천불전 좌우에는 불경을 배우는 학승들이 기거하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인 용화당(龍華堂)과 강사가 기거하는 건물이 있으며, 정면에는 가허루(駕虛樓)가 있다.
표충사는 대흥사의 사격(寺格)을 말해 주는 대표적인 건물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공훈을 세웠던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四溟)과 처영(處英)의 영정을 봉안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 일원의 당우 배치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표충비각(表忠碑閣)과 조사전(祖師殿), 정면에 삼문(三門), 삼문 밖에는 2층 누각인 의중당(義重堂)과 앞쪽으로 중문인 예제문(禮齊門)과 정문인 호국문(護國門)이 있다. 또, 의중당의 동쪽에는 서산대사의 유품을 비롯하여 절의 유물(遺物)을 보관하는 서산대사유물관이 있다. 표충사의 건물은 1789년(정조 13)에 건립되었고,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며, 정면 3칸의 맞배집이다.
의중당은 당시 6군의 군수가 봄·가을로 표충사에 제사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곳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서산대사유물관에는 선조의 하사품인 옥발(玉鉢)·비취옥발(翡翠玉鉢)·수저·금란가사(金棋袈娑)·금자병풍(金字屛風)과 표충사총섭사령패, 서산대사의 친필·교지·신발, 초의가 그린 관음도, 대광명전상량문, 승군단(僧軍團) 표지물, 철제 방패, 금과 은으로 쓴 불경, 금동불상 등 총 24종의 유물이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인 대광명전은 표충사 동쪽 300m 지점에 있으며, 조선 후기 초의가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이 지역을 동국선원(東國禪院)이라고 부른다.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석가불의 삼신불을 봉안하였고 ‘井’자의 천장에는 연화문과 운학(雲鶴)을 그렸다. 이 연화문과 운학 문양은 그 색채뿐 아니라 문양 자체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뛰어난 작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초의가 직접 단청을 하였다고 한다.
대광명전 옆에는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전면 8칸의 보련각(寶蓮閣)과 요사채가 있다. 이 밖에도 대흥사 역대 고승들의 부도와 비석을 봉안한 비전(碑殿)이 있다. 이 비전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서산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대흥사 13대종사와 13대강사 등의 부도 및 비가 있다.



보길도(甫吉島)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에 속하는 섬. 완도에서 서남쪽으로 23.3㎞ 떨어져 있고, 노화도 남서쪽 1.1㎞ 지점에 있다. 동경 126°37′, 북위 34°06′에 위치하며, 면적 32.99㎢, 해안선 길이 41㎞, 인구 3,370명(1999년 현재)이다.
남쪽에 적자봉(赤紫峰, 425m), 동쪽에 광대봉(廣大峰, 311m), 서쪽에 망월봉(望月峰, 364m) 등 전역에 산지가 발달하고 있으며 섬 중앙에 협소한 저지가 있어 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은 난류의 영향으로 온화한 해양성기후이며, 1월 평균기온 0.1℃, 8월 평균기온 25.3℃, 연강수량 1,285㎜, 연강설량 11㎜이다. 식생은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팽나무 등의 상록활엽수가 자라며 감귤도 재배된다.
경지 면적은 논 76.7㏊, 밭 314.8㏊, 임야 2,770.2㏊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콩·고구마·마늘·무·채소 등이 생산된다. 연안에서는 도미·삼치·멸치가 어획되며, 전복·소라의 해녀 채취 사업이 활발하고 굴 양식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은 목포·완도 등에서 여객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그리고 해남군 송지면의 땅끝에서도 운항되고 있다. 특히, 여름철에는 증편 운항되고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명칭의 유래를 보면, 옛날 영암(靈巖)의 한 부자가 선친의 묘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불렀는데, 지관이 이 섬을 두루 살핀 뒤 ‘십용십일구(十用十一口, 甫吉)’라는 글을 남기고 갔다.
이 글의 뜻을 풀기 위해 월출산 선암사의 스님에게 내용을 물으니 섬 내에 명당자리가 11구 있는데 10구는 이미 사용되었고 나머지 1구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졌다고 풀어 보길도라 불렀다고 한다.
1694년 이후 영암군 관할에 속하여 매년 조세를 징수하여 오다가 1870년(고종 7)에 면민들의 진원으로 방진(防鎭)을 설치하여 삼도진(三道鎭)이라 칭하였다. 1897년 완도군으로 부속되면서 노화면·보길면·임도면으로 분리되었다. 광복 후 3개 면이 노화면으로 다시 통합되었고 1980년 읍으로 승격, 1982년 보길출장소가 설치되고 1986년 보길출장소가 보길면으로 승격되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37호인 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은 윤선도(尹善道)의 유적지이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윤선도가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심취되어 부용동에 연못을 파고 세연정(洗然亭)을 세워 선유를 즐기며 불후의 명작인 〈오우가 五友歌〉와 〈어부사시사 漁夫四時詞〉 등을 남겼다. 현재 쓰이는 섬 내의 지명도 거의 그가 붙인 것이다.
동쪽 선백도 바위에는 송시열비(宋時烈碑)가 새겨져 있으며, 보길나루에서 발견된 조개더미와 예송리에서 표면채집된 유경역자식석촉(有莖逆刺式石鏃)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상록수림이 장관을 이루는 예송리해수욕장은 작은 자갈이 깔려 있고 중리해수욕장도 경치가 빼어나다.
풍어와 도서민의 무사를 기원하는 당제를 매년 섣달 그믐날 모시며 지신밟기와 농악놀이가 행하여진다. 또한, 큰 나무나 바위에 고사를 지내 안녕과 무사고를 비는 풍습이 있다. 북쪽 노화도와 마주한 청별 앞 바다에 매립 사업이 이루어져 행정 관서와 상가가 집중되어 중심지가 되고 있다.


보길도 윤선도유적(甫吉島尹善道遺蹟)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에 있는 윤선도 관련유적. 사적 제368호. 지정면적 83,532㎡.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32㎞, 해남반도의 남단에서는 12km 떨어진 외딴섬이다.
이 섬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격자봉(格紫峰)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계류가 흐르고 있는데,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이 일대에 정사(亭舍)와 연못을 축조하여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였다.
1637년(인조 15) 2월 윤선도가 51세 때 처음으로 보길도를 찾아 입구에 세연정(洗然亭)과 연못을 축조하였는데, 물과 바위와 대(臺)와 소나무·대나무 등을 이용한 조원(造園)공간으로 지금까지 부용동원림 중에서도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세연정에서 부용리 쪽으로 약 1.5 km쯤 들어가면 낙서재(樂書齋) 건너편 산비탈에 동천석실(洞天石室)이 있다. 이곳은 1,000여평의 공간으로 석문(石門)·석담(石潭)·석천(石泉)·석폭(石瀑)·석대(石臺)·희황교(羲皇橋)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석문 안의 두어칸 되는 반석(盤石)에는 다도(茶道)를 즐기던 흔적이 있고 그 주위로는 건물터가 있다.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하였다.
동천석실에서 남쪽으로 약간 내려오면 부용리에 인접한 평지가 나타나는데, 이 일대에 낙서재와 무민당(無悶堂)·곡수당(曲水堂)을 짓고 세상의 명리를 떠나 꾸밈없는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 밖에도 윤선도는 주변의 자연경관에 따라 각각 그 이름을 붙였는데, 낭음계(朗吟溪)·승룡대(升龍臺)·하한대(夏寒臺)·혁희대(赫羲臺)·독등대(獨登臺)·상춘대(賞春臺)·언선대(偃仙臺)·오운대(五雲臺)·조산(造山)·미산(薇山)·석전(石田) 등이 그것이다.
윤선도는 1637년부터 85세로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나 보길도에 왔다갔다 하면서 13년 동안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다.


다산초당(茶山艸堂)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정면 5칸, 측면 2칸.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건하여 이 해 사적 제107호(정다산유적 丁茶山遺蹟)로 지정받았다. 건물은 도리단층기와집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1970년, 1971년,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정석(丁石)·약천(藥泉)·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다조(茶鋤) 등 다산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 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 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 했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 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 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 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 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 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되었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 문제(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해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 가문에 태어나서 집권 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되었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문학적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 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 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문집 ≪고산선생유고 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 가인(三大歌人)으로 일컬어지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