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팠다.
피와 살뿐만 아니라 몸의 진액을 뽑아내 남에게 주는 일은 살이 찢어질 듯 쓰라리고 뻐근했다. 그것은 내 안에 고인 것을 나누지 않으면 결코 해소될 수 없는 통증이었다. 두 딸에게 모유를 먹이는 동안 앓았던 젖몸살의 기억이다.
지금은 빈약하게 말라있는 내 가슴도 젖을 먹이는 동안은 축구공 만하게 부풀어 올라 섬뜩하기까지 했다. 가슴 주위 유선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그 팽창된 힘을 이기지 못해 살갗이 툭툭 터져버리는 것처럼 쓰라릴 때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아이가 제때 젖을 물지 못하면 가득 찬 젖 주머니가 딱딱한 돌덩이처럼 굳어가면서 통증이 심해지곤 했다. 따뜻한 물수건을 대고 진땀을 흘리며 마사지 할 때의 고통은 또 어땠나. 아무리 성심성의껏 마사지를 해도 고통은 쉬 잦아들지 않았다.
젖몸살을 해소하는 것은 오직 어미의 젖에 생명의 끈을 매달고 있는 아이에게 젖을 물려 맹렬하게 빨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었다. 아이가 젖을 무는 순간 딱딱하게 경직돼 있던 가슴이 말랑말랑해지면서 온몸을 팽팽하게 채우고 있던 긴장이 스르르 풀려버리곤 하던 일들은, 매번 겪을 때마다 기적 같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온 힘을 다해 젖을 빨던 아이가 흡족한 미소를 띤 채 잠이 들면 어미도 그만 혼곤한 잠에 빠져들곤 했다. 몸 안을 채우고 있던 젖으로 아이의 배를 가득 채운 뒤에 찾아오던 꿀 같은 단잠이란….
젖먹이를 키우던 그 시절은 내게 아린 젖의 통증과 그것이 해소된 뒤에 몰려오던 형언키 어려운 안도감, 이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토록 진지하게 순정을 다 해, 또 모든 것을 다 바쳐 남과 무엇을 나눠 본 기억이 과연 내게 있었던가.
어릴 때는 심청이가 젖동냥으로 자란 아이였다는 걸 책에서 읽으면서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 못했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고만고만한 젖먹이 여럿이 어울려 자랐을 테니 어미 없는 갓난아이 하나쯤은 이웃들끼리 충분히 젖을 물려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
몇 년 전 귀농한 선배가 아이를 낳았더니 면사무소에 출생신고 용지가 떨어져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출생신고를 어떻게 접수해야 하는지도 몰라 허둥대는 기색이 역력했다는 말을 했다. 뿐만 아니라 면사무소 직원들이 아이 태어난 것이 신기하다며 단체로 구경을 왔었다는 말도 들었다. 심청이 같이 가련한 아이가 대한민국의 농촌에 태어난다면 남는 젖을 나눠먹으며 연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젖몸살을 앓던 그 시절, 심봉사가 어린 청이를 업고 젖동냥을 다녔다는 말을 떠올렸다. 젖몸살을 앓는 어미들에게는 젖을 나눠주는 일이 베푸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구원을 받는 일일 터였다. 젖이 남아 불어터지는 일은 이토록 즉각적인 신호를 보내 덜어내고 나누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그러나 온갖 입 호사를 하며 축적한 칼로리나 또 어디에 어떤 소용이 있을지도 모르면서 맹목으로 쌓아가는 돈이나 권력, 혹은 권력의 다른 형태일 지식 같은 것들은 차고 넘치게 쌓여있을 때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을 것이다. 그 고통은 죽을 때까지 영원히 자각도 못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그 무렵 어렴풋이 기억의 갈피 속에 남아 있다.
첫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리던 십여 년 전만 해도 젖을 먹여 아이를 키우는 일은 조금 특이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결혼하자마자 아무런 계획 없이 아이가 들어서고, 젖먹이 때문에 다른 모든 기회를 포기하는 모습이 경제적인 것과는 도통 거리가 먼, 야무지지 못한 여자의 전형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출산휴가를 사용하는 일도 껄끄러웠지만 아예 출산이 가까워지면 남들에게 폐가 되지 않게 직장을 그만 둬 줘야 하는 것을 임산부의 당연한 처신인 것처럼 강요하는 분위기도 드물지 않았다.
요즘 일반화된 백화점이나 지하철 같은 곳의 수유실도 당시에는 흔치 않았다. 또 어미젖은 일치감치 말려버리고 소에게서 젖동냥 하는 것이 영양이나 위생 또 몸매 관리에 맞다고 생각하는 엄마들도 많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일치감치 젖을 말리고 노동을 팔러 나가지 않을 수 없게 엄마도 아빠도 내몰렸다. 지금도 그 각박한 사정은 크게 달라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아이 안 낳는(아니 못 낳는) 나라가 된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아이를 낳을 때마다 직장을 포기해야했지만, 젖을 먹여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렇게 뻐근한 고통과 황홀한 기쁨을 동시에 주었다. 우유 먹여 키우는 엄마들이 외출할 때마다 보온병 분유통과 젖병을 거의 지게에 질 정도로 매고 다닐 때 나는 달랑 몸뚱이 하나만으로 아이를 업고 나가면 되었다. 자다가 보채는 아이 때문에 우유를 타러 일어날 필요도 없었고, 따뜻한 젖을 물려 아이이게 흡족한 미소가 번져가는 모습을 볼 때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 놀라운 일을 위해 나는 오로지 입에 맞는 좋은 음식을 골라서 배불리 먹는 것으로 충분했다.
젖은 아이가 먹고 남을 만큼 솟아나 번번이 웃옷을 적시게 만들었다. 전혀 작위적인 노력이나 피곤한 학습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젖을 물린 채 생각이 많아지고 스스로의 마음을 닦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 나누면서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고 있는 것 같은 깨달음의 기분마저 들곤 했다.
해월 최시형 선생 우리가 먹는 밥이 곧 ‘우주의 젖’이라고 하신 말씀도 젖먹이를 키워본 경험에 비춰 떠올릴 때 비로소 선명하게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내 입 안에 들어가는 숱한 곡식과 생선과 고기반찬과 콩과 배추와 무들, 이 모든 것 중 태양 에너지와 별의 부스러기가 아닌 것이 없고 남들의 호흡이거나 죽은 시체가 썩은 유기물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보면, 밥상에 둘러앉는 우리는 흡사 어미의 젖을 맹렬하게 빨고 있던 젖먹이 시절의 우리 아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지 싶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생명의 사슬로 이어져 있는 우리에게 나눔이란 오히려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 아닐까. 낡은 세포를 쉴 새 없이 쪼개며 생명을 이어가는 것처럼, 또 어미젖을 빨고 자라 아이에게 젖을 물려 키우는 일처럼 곁의 이웃들과 제 것을 덜어주는 일은 분명 주변과 제 스스로를 밝히는 일이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비록 자신에게 젖을 물려 키우는 일 말고는 별 뾰족한 나눔을 해본 적도 없는 미욱한 어미에 불과 하지만 말이다.
안으면 깃털처럼 아스라한 무게로 겨우 느껴지던 딸들이 이제 훌쩍 자라 큰 녀석은 어미보다 더 키가 버렸다. 여느 딸들처럼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귀에 꽂고 댄스곡들에 정신을 못 차리기도 하는 사춘기의 딸을 볼 때 지금도 가끔 젖이 핑 돌 때처럼 찌릿찌릿 전기적인 충격 같은 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얼마 전 딸아이가 초경을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런 탈이 없는 아이 대신 엄마인 내가 때 아닌 생리통을 앓았다. 보이지 않는 어떤 손길, 대우주의 어떤 신호를 받은 듯 신기했다. 그 일은 마치, 딸아이의 몸 안에서 새로운 우주가 펼쳐지는 그 순간, 섬광처럼 우리 사이에 이어져 있던 생명이 끈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루 종일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면서 나는 무슨 영적체험을 하는 사람처럼 어떤 경건함에 휩싸였다. 나와 내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안의 것을 나누어 새로운 우주를 만들고 먹여온 방식 그대로, 딸 아이 역시 이제 제 몸을 나눌 준비를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내 젖으로 키운 딸들 과 딸들이 자식처럼 아끼는 꿀꿀이와 곰돌이
그리고 나와 함께 딸을 만든 남자.
사진은 2003년 7월 담양 소쇄원 가는 길목의 느티나무 아래서 김영선 기자가 찍음.
* 2006년 11월, 아름다운 재단의 책 <콩반쪽>에 '나눔'에 대하여 쓴 글,글 김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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