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3.18일 서삼릉등 역사문화 탐방시 제 카메라에 잡힌 사진 몇컷 올렸읍니다.*윤재동*
출처 : | 서울역사문화포럼 | 글쓴이 : 국은 원글보기 ![]() | ||
메모 : | < 일정계획 > 사직공원정문(09:10)ꁾ통일로ꁾ삼송역ꁾ서삼릉(10:00)ꁾ통일로ꁾ능거리ꁾ공릉(11:00)ꁾLG로ꁾ금승리 네거리ꁾ황희선생 묘소(11:40)ꁾLG로ꁾ자유로ꁾ반구정(12:30~14:00)ꁾ중식(골밭 식당)ꁾ37번도로, 적성ꁾ경순왕릉(15:00)ꁾ37번도로ꁾ자운서원(16:00)ꁾ자유로ꁾ서울(17:30) ◇ 서삼릉 지정별 : 사적 제 200호 소재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7-1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조선시대 희릉(禧陵) · 효릉(孝陵) · 예릉(睿陵)을 합한 능 이름이다. 이 능 자리는 조선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尹氏)의 능인 희릉(禧陵)터로 택해진 곳으로, 한 때는 중종의 정릉(靖陵)이 이 능역(陵域)에 있었으나 문정왕후에 의하여 강남구 삼성동으로 천장(遷葬)하였다. 그 후 중종의 아들인 제12대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朴氏)의 효릉(孝陵)이 이곳에 자리 잡았고, 조선말의 철종과 그의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의 예릉(睿陵)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라는 능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근처에는 명종과 숙종~조선 말까지 역대 후궁을 비롯하여 또한 역대 3세자의 묘인 의령원(사도세자의 장남인 의소세손), 효창원(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 소경원(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이 있고, 역대의 후궁, 왕자, 공주, 옹주 등의 묘 51 기와 역대 왕의 태(胎)가 안장되어 있는 태실(胎室)이 있다. 총면적은 6만 5970평이다. ◇ 공·순·영릉 지 정 별 : 사적 제205호 소 재 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 공릉(恭陵) > 조선 제8대 예종의 원비(元妃) 장순왕후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韓明澮)의 딸로 1460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는데 성종3년(1472년)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따라서, 세자빈묘로 조성되어졌기 때문에 난간은 없으며, 봉분 앞에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長明燈)이 놓여 있다. 능 앞 양쪽에 문석(文石)과 석마(石馬)를 세우고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두 마리가 능을 호위하게 하였을 뿐이다. 문석은 옷주름 등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수법이 서투르고 선이 모두 굳어져 있다. < 순릉(順陵) > 조선 성종의 원비(元妃)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韓明澮)의 딸로 장순왕후와 자매 사이다. 1467년(세조 13) 11세로 가례를 올렸고, 성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5 년 뒤 18 세에 돌아갔다. 조선전기의 능 양식으로 돌기둥 난간을 둘렀고, 상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돌로 된 양, 호랑이 등을 배치하여 능을 지키게 하였다. < 영릉(永陵) > 조선 제 21대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眞宗으로 추존)와 며느리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趙氏)의 능이다. 효장세자는 10세의 나이로 돌아갔으며 효순왕후는 13세에 세자빈이 되었으나 홀로 되어 37세에 승하하였다. 영조는 차남 사도세자의 아들을 효장의 아들로 입적시켜 정조를 즉위시켰고,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여 능 이름도 영릉이라 하였다. 왕과 왕비의 쌍릉으로서 규모는 왕릉보다는 작고, 사대부의 묘보다는 크다. 이 능은 쌍릉(雙陵)으로서 각각 석상(石床)만 앞에 두고 장명등(長明燈)은 그 중간에 배치하였으며,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 필로 능 주위를 호위하게 하였다. 당초 효장세자의 장례에 있어 영조가 정자각(丁字閣)은 구제(舊制)로 지을 것과 석물(石物)을 본뜨게 하되, 사가(私家)의 석물에 비하여 조금 풍후(豊厚)할 정도로 할 것을 명하여 그대로 하였다. ◇ 신라 경순왕릉(新羅敬順王陵) 지 정 별 : 사적 제244호 소 재 지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신라의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979)의 능은 경순왕은 성이 김씨,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혹은 할아버지라는 설도 있음.)이고,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927년에 왕이 되어 935년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 년간 재위하였으며 978년(고려 경종 3)에 죽었다. 왕비는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이며,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에 왕건과 만났는데, 수십 일을 머물면서도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였다. 935년에 경순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국가를 고려에 넘겨줄 것을 결의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國書)를 전하게 하였다. 이 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歸依)할 때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태자보다 위인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였다. 그런 다음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채용하였다. 또한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는데 978년(경종 3) 4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가 조선시대에 찾게 되었다고 하며,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무덤의 외형은 둥근 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둘레에는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돌렸고, 능 주위로는 곡장(曲墻)이 돌려져 있다.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 있는 비문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 영조 23년(1747)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능 앞에 있는 기타 석물로는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2개가 마련되어 있다. 신라왕릉의 경우에는 곡장(曲墻)이 없으나, 고려시대에 왕릉에 곡장을 마련하고 있으므로 경순왕이 죽자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표석. 상석.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석양·망주석 등 석물(石物)은 모두 조선 후기의 양식이다. 표석 전면에는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은 5행으로 경순왕의 간략한 생애를 기술한 87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비각 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는 비가 있다. 이 비는 6·25전쟁 전까지 고랑포리 마을 한복판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이후 원당리 고랑포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져 보호해 오다가 1986년 비각을 새로 건립, 현재의 위치에서 보존하고 있다. 대좌(臺座)는 최근 화강암으로 다시 마련하였으며, 비신(碑身)의 높이는 132㎝, 너비 66㎝ 규모에 변성암 재질로 되어 있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돼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비신 중간과 하단 일부분에서 10 자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경순왕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마의태자, 막내는 범공이다. 이 때 마의태자는 "나라가 존속하고 망함은 반드시 천명이 있을지니 다만 충신과 의사로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양도해도 되거늘 어찌 가히 1,000 년의 오랜 사직(社稷)을 가벼이 넘길 수 있느냐"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순왕은 "형세가 이와 같이 위태로워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면 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당하게 함은 내 차마 견딜 수 없는 일"이라며 마의태자를 위로 했다. 마의태자는 그 길로 왕과 이별,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바위틈에 집을 짓고 마의를 걸친 채 풀뿌리로 연명했으며, 둘째 아들 범공은 화엄사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태조 왕건은 935년 11월, 항복하러 오는 경순왕 일행을 극진히 맞이한 후 나중에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 보내 사위로 삼고, 또한 경순왕은 답례로 자신의 조카딸을 왕건에게 보냈다. 훗날 사람들은 경순왕의 사당을 지어 그를 숭배하였는데 이유는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것이 백성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기도 연천군은 2005년 12월 말부터 '경순왕릉'을 완전 개방하였다. 이 능은 남방한계선(DMZ)과 인접해 있고, 주변이 지뢰지대로 남아있는 등 민통선 내에 소재, 그 동안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야만 제한적으로 출입이 가능하였으므로 군부대와 5 차례에 걸친 협의를 거친 끝에 민통선 초소 이전에 합의, 3억 4,000여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초소를 신축하고, 이 능으로 이어지는 도로 주변에 1.1㎞ 펜스를 설치하였다. ◇ 황희정승 묘소 · 사당 지 정 별 : 경기도 기념물 제34호 소재지 - 경기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1 조선 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던 방촌(庬村) 황희(1363∼1452)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공민왕 1년(1389)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록을 지냈으며 고려가 멸망하자 한 때 시골에 은거하였으나 조정과 동료들의 간청으로 다시 관직에 돌아와 여러 직책을 두루 맡았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6조의 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초기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태종 대의 관직생활을 통해 얻은 국정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경험을 토대로, 세종 대에는 20여 년간 국정을 총괄하던 의정부에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문예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世宗盛世)에 크게 공헌하였다.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으며 봉분의 규모 역시 크다. 봉분의 아랫부분은 화강암으로 둘레석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床石)과 향로석 등의 석물이 있다. 좌우에는 동자상과 문인석이 한 쌍씩 있고, 묘역 아래에는 그의 업적을 기린 사적비와 1945년에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묘 근처 길가에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 반구정(伴鷗亭) 지 정 별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 소 재 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190 조선 전기 세종연간에 건립한 이 정자는 고려말~조선초기의 문신이며, 명상(名相)인 청백리 방촌 황희(黃喜 : 1363∼1452)선생이 18년간 정승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89 세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황희 정승은 좌천, 파직, 귀양살이 등을 당하면서도 60 년간의 관직생활을 통해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돕는 등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임진강 하류 기슭에 세워진 이 정자는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 하였다. 분단의 현실을 체감할 수 있는 철조망이 반구정 언덕과 임진강을 가로 막아 낙조(落照)가 들면 더없는 슬픔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황희 정승의 사후에 그를 추모하는 8도의 유림(儒林)들이 유적지를 수호하여 내려왔으나 애석하게도 6·25전쟁 때 모두 불타버렸다. 그 뒤 이 일대의 장수 황씨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에 시멘트로 개축한 뒤 1975년에는 단청을 하고, 축대를 수리하였다. 그 후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그 옆에 앙지대(仰止臺) 등을 목조건물로 개축하였다.(정면2칸, 측면2칸) 이곳은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강안(江岸) 기암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을 볼 수 있다. 허목(許穆)의 「반구정기(伴鷗亭記)」를 보면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기러기가 철새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20리이다.」라고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이 곳에는 방촌 영당(尨村影堂 : 경기도 기념물 제29호)과 제사를 지내는 경모재(景慕齋)가 구역 내에 있으며, 임진강을 바라보고 있는 황희 정승 동상이 서 있다. 영당은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겹처마의 맞배지붕으로,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影幀)을 모셨으며,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반자가 꾸며진 우물천장이다. 건물 주위에는 직사각형의 담장이 둘러쳐 있으며, 정면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황희 정승은 상주의 옥동서원과 장수의 창계서원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 자운서원(紫雲書院) 지 정 별 : 경기도 기념물 제45호 소 재 지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 5-1 이 서원은 광해군 7년(1615)에 지방 유림들이 율곡 이이(栗谷 李珥 : 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효종 1년(1650)에 ‘자운(紫雲)’이라고 사액(賜額)되었으며, 그 뒤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 배향하였다.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어 위패는 매안(埋安)하고, 서원 터에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그 뒤 1969년에 지방유림의 기금과 국비 보조로 정문인 삼문 6.2평을 복원하고, 1972년 경내 주위를 정비하면서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1975년과 1976년에 걸쳐 보수하였다. 서원 경내에는 팔작지붕으로 된 6 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등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서원의 좌측 능선에는 이이와 부모의 묘소가 있고, 근처에 경기도 교육청에서 설립한 율곡교육원이 있다. 사우에는 이이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8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이 서원 우측 능선에는 율곡선생과 부인, 그의 부모를 모신 묘소가 있다. 율곡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묘소는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의 내삼문 밖 우측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된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가 있는데 이 비는 율곡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한편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의 하단은 4개의 두꺼운 판석으로 지대석(地臺石)을 만들고, 그 위에 사각의 비좌(碑座)를 놓았는데 높이 77cm의 비좌에는 윗면에 복련문(覆蓮文)이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연주문(蓮珠文)과 괴운문(怪雲文)이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예서체로 되어있는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당대의 명필인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이 썼다. 비의 상단에는 김수항(金壽恒)이 쓴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라는 전액(篆額-머리글)이 쓰여져 있으며 비문 끝의 "崇禎五十六年癸亥"(숭정56년 계해)라는 기록으로 보아 비의 건립연대가 숙종 9년(1683)임을 알 수 있다. 자운서원 경내 좌측 산기슭에는 이이선생 신도비(李珥先生 神道碑 : 파주시 향토유적 제6호)가 세워져 있다. 이 신도비는 율곡선생이 돌아간 지 47 년이 지난 인조 9년(1631) 4월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전액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재질은 대리석으로 앞뒷면에 걸쳐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앞면에 몇 군데의 총탄 흔적이 있다. 파주시에서는 매년 9월 하순~10월 초순에 율곡문화제를 거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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