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울 60리 둘레를 현무도의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호위하고 있는 한양의 도성은 애초 남산과 북악산을
제외하고는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
이것을 세종이 모두 돌로 쌓았으니,
연 인원 32만 2,400명이 동원되어 98 일만에 완성을 보았다.
대규모 인력 동원을 통한 단기의 공사였다 .
옛 법도대로 따르자면 성곽은 사각형 모양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 양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짓다보니
굽이굽이 산성이 되어 물결쳤다 .
성곽의 기본 출입문은 동·서·남 ·북의 4대문이었으나,
이외에 도 4소문과 그 밖의 여러 문이 있었다.
4소문은 혜화문·창의문·소의문· 광희문이다.
그 가운데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 시체가 나가는 문)으로 불려졌다.
조선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 체는 반드시 서쪽은 서소문으로,
동쪽은 광희문으로 나가게 하고,
다른 문으로는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시구문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수구문이라는 명칭은 청계천이
수문 근처를 통해 성 밖으로 흘러나가고,
남산의 물이 광희문 부근을 통과하여
나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에서는 콜레라 등의 전염병 이 유행하면
환자들을 광희문 밖에 내다 버리곤 하였다.
이에 시골 사람들은 “한양에 가거든 수구문 돌담의
돌가루를 긁어 오라”고 부탁하 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광희문 밖 돌가루가 병마를 물리치는데
효 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광희문이란 이름보다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 불렀다.
그리고 ‘못된 바람은 시구문으로 분다 ’는 말도 있었다.
또 다 죽게 된 사람을 ‘시구문 차례’라고 했으니 ,
양반은 물론 보통 사람도 이 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혜화문
광희문
시구문(屍軀門)·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1719년(숙종 45)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언제 무너졌는지 알 수 없으며 석축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복원시 홍예석축(虹霓石築)을 해체해 남쪽으로 15m 옮기고, 문루 12평을 새로 짓고 주변의 200평을 녹지화했다. -네이버에서
성문 안쪽 우측 계단을 오르면 성벽 초입에 음각으로 새겨놓은 ‘일패장 성세각(一牌將 成世珏) ’, ‘석수도변수 오유선(石手都邊手 吳有善)이라 쓰인 글씨가 보입니다. 이는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 새겨 놓은 공사 담당 책임자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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