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서울 문화재 유적

4소문(혜화문,광희문,창의문,소의문)

서울문화 2007. 2. 10. 07:55

 서 울 60리 둘레를 현무도의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호위하고 있는 한양의 도성은 애초 남산과 북악산을

제외하고는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

이것을 세종이 모두 돌로 쌓았으니,

연 인원 32만 2,400명이 동원되어 98 일만에 완성을 보았다.

대규모 인력 동원을 통한 단기의 공사였다 .

옛 법도대로 따르자면 성곽은 사각형 모양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 양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짓다보니

굽이굽이 산성이 되어 물결쳤다 .

성곽의 기본 출입문은 동·서·남 ·북의 4대문이었으나,

이외에 도 4소문과 그 밖의 여러 문이 있었다.

4소문은 혜화문·창의문·소의문· 광희문이다.

그 가운데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 시체가 나가는 문)으로 불려졌다.

조선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 체는 반드시 서쪽은 서소문으로,

동쪽은 광희문으로 나가게 하고,

다른 문으로는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시구문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수구문이라는 명칭은 청계천

수문 근처를 통해 성 밖으로 흘러나가고,

남산의 물이 광희문 부근을 통과하여

나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에서는 콜레라 등의 전염병 이 유행하면

환자들을 광희문 밖에 내다 버리곤 하였다.

이에 시골 사람들은 “한양에 가거든 수구문 돌담의

돌가루를 긁어 오라”고 부탁하 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광희문 밖 돌가루가 병마를 물리치는데

효 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광희문이란 이름보다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 불렀다.

그리고 ‘못된 바람은 시구문으로 분다 ’는 말도 있었다.

또 다 죽게 된 사람을 ‘시구문 차례’라고 했으니 ,

양반은 물론 보통 사람도 이 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혜화문

 

 광희문

 

 

 


 


시구문(屍軀門)·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1719년(숙종 45)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언제 무너졌는지 알 수 없으며 석축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복원시 홍예석축(虹霓石築)을 해체해 남쪽으로 15m 옮기고, 문루 12평을 새로 짓고 주변의 200평을 녹지화했다. -네이버에서


 


문 안쪽 우측 계단을 오르면 성벽 초입에 음각으로 새겨놓은 ‘일패장 성세각(一牌將 成世珏) ’, ‘석수도변수 오유선(石手都邊手 吳有善)이라 쓰인 글씨가 보입니다. 이는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 새겨 놓은 공사 담당 책임자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룹명 > 서울 문화재 유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균관 문묘답사(4/26)  (0) 2007.04.27
경복궁 답사하기  (0) 2007.02.20
서울성곽둘러보기(펌)  (0) 2007.01.25
운현궁2  (0) 2006.11.27
운현궁에서 지킴이 교육을(11/24)  (0) 2006.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