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근교수의 대승기신론강의-1
대승불교연구원에서는 불교의 중요한 경전에 대해서 원전을 강의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유식삼
십송과 반야심경찬 그리고 바로 전에 끝난 금강삼매경론은 장장 3년 8개월에 걸쳐서 공부해 왔
습니다. 이번에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
은 많은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기초적인 실력을 갖추고 오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고 넘
어갈 수 있도록 하나하나 해석을 하면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질문
을 하시면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원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원효는 어떤 분인가를 살펴보
고, 또 기신론의 위치를 말씀드리고 나서 원문 해석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원효의 학문적 고찰
원효대사는 승려이자 대학자이며 사상가이다. 불교 사상가를 거론할 때 인도에는 용수가 있고,
중국에는 천태 지자가 있으며, 한국에는 원효가 있다고 할 만큼 원효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학
자이다. 우리가 공부할 대승기신론을 설하신 마명(馬鳴)도 용수 이전에 대승불교를 일으켰고
또 이와 같은 대승논전을 저술해서 유명하지만 저술 면이나 활동 면에서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인도에서는 용수를 대표적인 학자로 꼽는다. 용수는 대승불교를 줄기차게 부르짖고 또 그 당
시에 침체되었던 소승불교를 개혁하고 또 현상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하기 위해서 공사상을 부르
짖었던 분이다. 그래서 인도의 학자들 중에서 모든 공과를 따질 때 용수만한 업적을 남긴 학자
가 없다고 해서 용수를 대표로 꼽고 있다.
중국에는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많다. 근자에는 현장법사를 들고 나와서 중국 불교의 모든 면을
현장을 중심으로 통일하고, 사회주의 이후에 불교를 내세워서 점진적으로 문화를 정착시키고,
서구적인 경제문화는 받아들이지만 종교나 일반 정신문화는 중국의 전통사상으로써 자리매김해
서 다음에 문호를 열자는 말들을 중국에서 들었다. 중국에서는 종교자유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도 은연중에 불교를 내세워 정신문화를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지금은 현장법사를 중심
으로 불교를 발전시키려고 하고 있지만 현장법사 이전에는 천태 지자대사가 선배 격으로 약 50
년 내지 100년 전에 천태학을 일으켰다.
천태 지자대사는 법화사상을 가지고 회삼귀일(會三歸 一)이라는 사상을 내세웠다. 회삼(會三)에서삼(三)은 바로 성문, 연각, 보살을 말하는데 이 사회에는 범부를 비롯해서 ! 많은 차별된 근기와 수행 자가 있는데 그들을 교화하고 누구나 진리의 세계에 귀의할 수 있도록 체계화 했다. 그것을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한다.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이러한 다양한 차별된 근기들은 교화하면 누구나 다 최고의 경지인 일승(一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귀일(歸一)이라고 한다. 누구나 다 성불도 할 수 있고, 보살이 될 수 있고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귀일(歸一)을 다른 말로 하면 불승(佛乘)이라고 한다.
원효대사도 천태 지자대사의 법화사상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신라 불교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일승사상을 펴서 신라 국민이 모두 진리의 세계에 귀일 할 수 있는 사상을 펼쳤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된다. 중국에서는 천태 지자대사가 그런 역할을 하고 오시팔교(五時八敎)라는 사상을 체계화 했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교하신 것을 부처님 일대시교라고 하는데
아함경에서 법화경에 이르기까지 다섯 분야로 나누어서 불교를 체계화한 사상을 교판사상이라
고 한다. 원효도 교판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사상을 펼쳤는데 중국의 법장에게 많은 영향을 斂된
다. 중국에는 천태 지자대사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신라의 원효가 있다. 이 말은 근대에 와서 나
온 말인데 우리나라 불교를 통 털어서 사상이나 수행 내지 실천면에서 평가할 때 원효가 단연 으
뜸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원효는 특히 실상불교를 실현했다고 본다. 실상은 유심주의를 말한다.
우리 인간은 하나하나의 행동에 있어서 마음이 중심이 되어 행동한다. 원효 당시에 화엄경이나
해심밀경 같은 유심사상(唯心思想)은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서 창조되고 마음에 의해서 실현된
다고 보는 사상을 말한다.
모든 진리는 마음에 의해서 창조될 수 있다. 창조라는 말은 진리 자체
를 창조한다는 말은 아니다. 진리는 본래 존재하고 시공을 초월한 진리의 체로써 그것을 불변이
라고 한다. 그런 진리가 있지만 후대의 우리 인간들은 모르고 사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것을 알
도록 해서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을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후천적으로 하나하나 깨달아가
는 것을 기신론에서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으로 나눈다. 본각(本覺)은 본래 지니고 있는 깨
달음을 의미하는데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시각(始覺)은 배우고 익혀서 기신론이나 원효에 의
해서 하나하나 깨달아가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은 마음이 열리고 지혜가 나 립ご것을 말한다. 진
리는 본래 우리 마음속에 있지만 무지에 의해서 덮여있던 지혜가 구름이 걷히듯이 하나하나 드
러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깨달아가는 현상들을 시각(始覺)이라고 한다. 그런 시각은 단계를
거치면서 좀더 넓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 범부의 위치에서는 이와 같이 기신론과 원효의
사상을 만나서 배우고 익혀서 하나하나 깨달아간다.
그리하면 연각(緣覺)이나 성문(聲聞)의 위
치로 올라가게 되고 다시 더 깊은 이치를 깨달으면 보살의 위치로 올라가고 마지막에는 결국 부
처의 위치로 도달하게 된다. 기신론에서 보면 처음의 깨달음은 깨닫는 듯 마는 둥 해서 깨달음
도 아니라는 뜻에서 불각(不覺)이라고 한다. 범부들이 깨닫는 그런 정도의 깨달음을 범부각(凡
夫覺)이라고 한다. 그 다음 조금 진일보해서 성문이나 연각승들이 얻은 깨달음을 상사각(相似
覺)이라고 한다. 깨달았다고 하지만 진짜 깨달음이 못되고 깨달음과 비슷하다고 해서 상사각이
라고 붙여진 것이다. 또 더욱 나아가서 보살의 위치에서 진여법성을 부분적으로 깨달아 들어가
는 것을 수분각(隨分覺)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면 최고! 의 깨달음을 얻
게 되는데 그것을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불 각에서 구경각에 도달하기까지를
모두 시각(始覺)이라고 한다. 시각이 최고의 깨달음인 구경각에 도달하면 시각이 본각과 같아진
다. 시각이라는 말은 범부나 수행자의 입장으로써는 본래 우리가 진리의 세계에서 살았고 진리
의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등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러다가 이와 같은 불교를 만나서 진
리를 깨닫게 되니까 새로운 것처럼 생각이 든다. 그런 입장에서 창조라고 한 것이다. 원효대사
는 화엄경이나 유식학적 대승불교의 유심주의를 받아들이고 동시에 용수의 공사상(空思想)을
받아들여 종지(宗旨)를 정립해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상을 펼쳤다.
인도에서는 용수를 팔종파(八宗波)의 종조(宗祖)라고 말한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삼론종이나
정토종 또는 화엄종 같은 종파에서 사상적 종조를 찾아가면 용수가 초조(初祖)가 된다. 원효대
사는 우리나라의 종파적 교리를 폈다. 우리나라 근대적 불교 사학자로 『조선불교통사』를 쓴
이능화 선생님은 원효를 육종(六宗)의 종조라고 표현하고 있다. 원효대사는 첫째로 화엄종의 종
조다. 물론 화엄학을 창시한 것은 의상대사 이지만 원효대사의 화엄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막
대한 영향을 끼쳤다. 원효대사의 화엄사상은 중국이나 일본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중국의
현수는 원효대사의 화엄학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두 번째로 원효대사는 정토종의 종조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같
은 정토에 관련된 서적이 서너 가지가 있다. 그것들은 대단히 훌륭한 저술이기에 우리나라뿐 아
니라 일본에 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는 정토종의 활동이 대단히 활발하다. 그러한 정토
사상의 원조가 원효라고 신봉할 만큼 일본 정토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세 번째 원효사상은 유식학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봐서는 원효 보다는 조금 선배인
원측법사를 유식학의 초조(初祖)로 대개 말을 한다. 원측, 도증, 태현 이런 식으로 맥을 이어오
는 것으로 유식학에서는 말을 하지만 원측법사는 신라인이기는 하지만 중국에 들어가서 일생
을 거기서 마쳤다. 그런데 원효대사는 국내에 있으면서 유식학을 달관을 하였다. 초기 작품으로
<이장의(二章義)> 같은 작품을 저술하였고, 기신론소에서도 유식학을 많이 인용해서 기신론를
해설 하였다. 그리고 금강삼매경론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은 거의 유식학을 인용해서 해설을 하
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원효의 사상을 유심주의(唯心主義)라고 할 수 있다.
원효사상은 위에서 살펴본 것 외에 법상종과도 관련이 있으며 또한 삼론종이나 열반종과도 관련
이 된다. 원효의 작품 중에 <열반경종요>라는 저술이 남아있다. 이와 같이 원효의 사상은 학문
적으로 매우 다양하다.
원효의 전기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 617년에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서동(誓憧)이고, 16살에 출가했다. 원
효는 生而知之 學不從師라고 할 만큼 남달리 영특하였다. 낭지대사에게 사사 받았다는 말이 있
기는 하지만 대체로 특정한 스승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불법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원
효대사는 문헌을 통해서 보면 현장법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송고승전>에 보면 자은
대사의 학문을 흠모하여 입당코자 했다는 내용이 있다. 중국에서 자은대사라고 불리는 사람은
현장법사와 규기법사 두 사람이 있다. 현장법사와 규기법사가 자은사(慈恩寺)에 거주한데서 나
온 말이다.
자은사는 현장법사를 기념해서 국가에서 지어준 절이다. 지금도 서안에 가면 자은사
와 현장탑이 있다. 현장법사를 삼장법사라고 하기도 하는데 규기법사도 자은사에 있었기 때문
에 두 사람을 다 ! 자은대사라고 지칭했다. 원효대사가 자은의 학문을 흠모했다고 하는 것은 그
때 당시에 현장법사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현장법사를 지칭한다. 일본사람의 어떤 책에서는 자은
대사를 규기법사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원효대사가 규기법사를 보고 입당
할 리는 없다.
왜냐하면 원효대사는 현장법사가 번역한 『유가사지론』이나 『성유식론』 같은
책들은 현장이 번역한 책들이며, 원효대사의 저술에서는 그러한 책들을 참 많이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정으로 보아 원효대사가 자은대사를 흠모했다는 것은 현장법사를 지칭한다.
원효대사는 의상대사와 함께 입당하려 했지만 가는 도중에 사건이 발생하여 의상대사만 당나라
로 가고 원효대사는 가지 못한 것으로 되어있다.
원효(元曉)의 법명에는 무엇 뜻이 들어 있을까? 원(元)이라는 말은 처음 또는 으뜸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효(曉)는 깨달을 효 또는 밝을 효 또는 새벽 효로 사용된다. 自稱元曉者 初輝佛日之
意爾 라는 말이 나온다. 원효는 처음 부처님의 일광을 비추었다는 뜻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
을 정리해 보면 원(元)은 처음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고, 효(曉)는 부처님의 지혜가 밝게 비추었
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원효는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탄생시킨 후 자칭 자신을 소성거사(小
姓居士)라고 하면서 대중 교화에 힘썼다. 원효는 대중들을 포교하기 위해서 때로는 노래도 부르
고 춤도 추면서 대중들에게 감화를 많이 주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일광(日光)에 비유되
었다. 원효는 워낙 훌륭했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원효를 부처님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원효
가 탄생한 마을을 ! 불지(佛地)라고 불렀고 원효가 살던 집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원효대사에 대한 일화
원효대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이한 일화가 많다. 어느 날 원효대사가 중국 쪽을 바라다보
니 화엄학의 도량인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除寺)에서 법회를 하고 있는데 큰 사고가 날 것 같
은 느낌이 들어서 운제사를 향해서 널빤지를 던졌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널빤지가 날아오는 것
을 보고 밖으로 뛰어 나왔는데 잠시 후에 그 화엄도량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래서 거
기 모인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구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 원효대사가 고선사(高仙寺)에 계실 때에 있었던 일이다. 원효대사가 외출하고 돌아오는데 12
살 될 때 까지도 말을 못한 사동(蛇童)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동의 어머니는 남편도 없이
사동을 낳아서 길렀는데 사동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것이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길을 가다가
그 장면을 보고 혼자서 염을 해서 사동 어머니의 장례를 지내주었다. 거기서 한 말이 유명하다.
莫死兮 其生也苦 죽지 말지어다 곧 태어나는 것은 또한 고(苦)이기 때문이다. 莫生兮 其死也苦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음이 곧 고(苦)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조사(弔詞) 시인
데 이것을 통해서 보면 원효대사는 생사관이 뚜렷하고 생사에 달관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생 과 사의 문제는 바로 업력의 문제다. 여기서 간단히 죽지 말지어다 태어나는 것이 고(苦)라고
한 말은 윤회할 있는 업력을 지었기 때문에 생사가 되풀이되기 때문에 이 말을 조금 달리 표현
하면 생과 사를 가져올 수 있는 업을 짓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업을 짓는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에는 우리 마음속의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악업(惡業)을 짓게 된
다.
악업이 발생하면 그것이 조성이 되어서 나쁜 과보(惡果)를 가져온다. 그러기 때문에 기신론
소에서도 진여법성을 처음에 망각하는 심리현상을 무명의 업상(業相)이라고 한다. 그러면 무명
은 무엇인가? 그것은 제칠 말나식이 바로 자신에 대한 인연의 현상을 망각하고, 진여의 체상을
망각하고 무명을 일으키게 된다. 인간의 생사문제는 그와 같은 악업을 짓지 말아야 하고, 악업
을 짓지 않으려면 마음을 수행해야 한다. 마음을 수행해서 마음을 정화하여 마음속에 청정한 업
을 쌓아야 그럼으로써 우리가 생과 사를 면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효의 저술
원효대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육종(六種)의 종조라고 할 만큼 많은 저술을 지었다. 원효대사
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불교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와 같은 논쟁의 내용
이 화쟁론에 들어 있는데 화쟁론은 현재 일부분만 남아 있다. 화쟁론의 유식학 관계를 보면 중국
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던 문제들이 신라에 들어와서도 논쟁거리가 되었다. 가장 죄를 많이 짓고
또한 가장 무지한 사람도 성불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사람을 일천제(一闡提)라고 하고, 유식학에서는 무성종성(無性種姓)이라고 한다. 일천제(一闡
提)라는 말은 열반경에서 나온 말인데 그 말은 열반경에서부터 문제가 되었다. 이런 말이 유식학
에서 인도의 호월논사는 오성종성(五性種姓)이라는 학설을 주장하였다. 그것을 현장법사가 중
국으로 들여와서 바로 자기 직계제 愍규기대사에게 전해 주었다. 그래서 법상종(法相宗)이라는
종파를 조직해서 자기 신도들에게 이런 사상을 심어 주었다. 오성종성(五性種姓)에는 계급타파
와 인간 차별을 없애는 사상이 들어 있다.
불교는 불교이전에 신의 창조설을 배격하고 모든 것
을 인연법으로 창조된 것이라고 한다. 만물은 신의 창조가 아니라 모든 것이 인연법에 의해서 창
조된 것이라는 사상이다. 그래서 불교는 연기설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도에는 태어날 때
부터 신에 의해서 정해진 세습적 신분이 네 가지 계급으로 나누어지는 카스트제도가 있다. 그것
을 타파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 불교이다. 그런데 호월논사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다섯 가지
근기가 정해져 나온다고 하는 오성설(五性說)을 주장했다. 오성(五性)은 성문승(聲聞乘), 연각
승(緣覺乘), 보살(菩薩), 부정종성(不定種姓), 무성종성(無性種姓)을 말한다.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菩薩)의 세 가지는 태어날 때부터 근기가 정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
정해지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가 있다. 그것을 부정종성(不定種姓)이라고 한다. 부정종성(不定
種姓)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 문에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종성(不定種姓)은
성문과 연각 말而疸아니라 부처까지도 될 수 있는 종류의 소유자를 말한 다. 마지막으로 무성종
성(無性種姓)은 무명(無明)의 번뇌가 많고 죄를 많이 지어서 이 세상에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존재를 말한다. 그래서 법상종에서는 무성종성(無性種姓)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데 우리나라 원측법사는 그것을 배격했다.
원측법사는 일승(一乘)사상을 받아들여서 무성종성
까지도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으로 봤을 때 신라 불교가 중국 불교보다
사상적으로 한 수 위인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도 무성종성(無性種姓)이 구제될 수 있을까 없
을까에 대해서 논쟁이 많았다. 얼마 전 군대에서 무고한 군인 8명을 죽인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
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까지도 구제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죄는 밉지만 사람
은 교화의 여지가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와 같은 것이 무성종성(無性種
姓)의 문제이다. 그 문제가 신라로 들어와서도 논쟁거리가 되었다. 법상종의 계통에서는 무성종
성은 아예 성불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고,
반면 원측법사를 비롯한 신라계 학자들은 인간에
게 누구나 불성이 있는 까닭에 일시적으로 망각을 해서 무명이 싹트고 무지한 생활을 한 것뿐이
지 언젠가는 반성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무성종성까지도 성불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
다고 보았다. 원측법사의『해심밀경소』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은 너무나 유명해서 티벳트 장경
에 들어가 있다. 거기에 그러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것이 신라에 와서 원효의 화쟁론에 무성종성
이 구제의 대상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원효대사는 논쟁(論爭)이나 싸움
의 원인은 집착 때문이라고 보았다. 논쟁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 생겨난다.
그래서 원측법사는 논쟁(論爭)을 번뇌의 현상으로 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가열되면 세상이 시끄러워지게 된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그런 논쟁들을 화합시키는 이론
을 전개했다. 원효는 화쟁론을 내세워서 신라의 분열된 사상을 통일시키고 화합시키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고려 숙종 때는 원효대사를 화쟁국사(和諍國師)라고 칭하고, 화쟁국사
를 기념하기 위해서 탑도 세웠다. 원효대사는 화쟁으로써 공적을 많이 쌓았다. 어느 시대나 모
든 이론을 ! 통일시키고 사상을 화합 시켜서 그 사회를 정신적 안정을 도모하며 바르게 이끌어
준다면 최상의 지도자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많은 사상이 있지만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원효 사상은 이 시
대에 대단히 필요한 사상이다. 우리가 이런 원효사상을 연구하고 잘 정리해서 이 세상에 보급함
으로써 모든 대중들이 평화로운 마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
서 대승불교연구원에서는 지난번에는 금강삼매경론을 같이 공부했고, 이번에는 대승기신론소
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아주 유명하다. 이 기신론소가 너무 잘돼서 중국
에 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중국의 화엄학자로 유명한 현수가 <기신론소의기>를 저술할 때
원효의 기신론소와 교판사상을 인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원효의 화엄사상과 기신론소는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효는 누구도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알차게 저술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원효의 저술은 약 20여 종이 남아 있는데 전체 저술은 102부 303권을 저
술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금강삼매경론>이나 <대승기신! 론소> 또는 <열반 종요>나
< 법화종요> 같은 책들을 보면 중국이나 일본의 어느 책도 여기에 따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저술들이다. 원효의 저술은 꼭 필요한 말만 써서 군더더기가 전혀 없고, 대단히 논리적이
다. 기초가 없이 원효의 저술을 접하면 좀 딱딱하다는 말을 하지만 좋은 글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감탄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좋은글은 넣고 뺄 부분이 전혀 없이 적재적소에 가
장 필요한 말만이 들어있는 글을 말한다.그래서 원효대사를 해동불(海東佛)이라고 부르기도 했
다. 원효대사의 글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어서 원효대사를 진나의 후신이라는 말을
할 정도이다. 진나는 AD 5세기 경의 유식학자로 <신인명론>를 만들었다. 인도에서는 철학의
한 분야처럼 글을 쓸 때 필요한 논리학이 있었다.
불교로 와서는 이와 같은 것을 <인명학(因明學)>이라고
하는데 글을 쓸 때 반드시 원인과 결과를 밝혀서 논리성과 일관성을 추구하여 좋은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웬만한 글은 다 도태되고 지금까지 이름이 남아있
는 용수나 세친, 무착 같은 사람들의 저술과 원효의 기신론 같! 은 저술들은 명저로써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인명학적 입장에 서 저술했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이러한 인명학을 연
구했다.
그래서 인명학으로써도 중국학자들을 능가하는 실력이 있었다고 한다. 진나논사는 인명
학을 대폭 개혁하여 <신인명학>을 저술한 사람이다. 진나논사는 우리 마음을 이야기할 때에도
그냥 마음으로 어떤 것을 보고 들어서 알았다 하는 식이 아니고 우리가 무엇을 보았다면 그 본
것이 물질에 있느냐 우리 마음이 물질을 볼 수 있도록 작용을 했느냐 하는 것을 따진다. 우리가
눈으로 의자를 보았다면 의자는 의자대로 있지만 의자의 모습을 조작해서 마음 위로 의자의 모
습을 띠우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그와 같은 현상을 나타내서 내면에서 그 현상을 본
다.
그래서 우리가 의자를 보고 마음 위에 떠올리도록 하는 것을 상분(相分)이라고 하고, 우리
가 사물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작용을 견분(見分)이라고 한다. 마음 안에서 주관과 객관이 이루어
지며 모든 것이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잘 보고 못 보고 하는 것은 모두 마음안에서 이루어지
는 현상이다. 밖의 사물이나 모든 것은 마음으로 와서 마음속에서 좋다 나쁘다 또는 즐겁다 괴롭
다 하는 것이 모두 마음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로 진나논사는 상분(相分), 견분(見分)
그리고 자증분(自證分)으로 분류하는 삼분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호법논사가 증자증분
(證自證分)을 추가해서 사분설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학자들은 대부분 사분설 보다는 삼분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 같은 논리와 인명학이 원효에게 까지 전해져서 원효가 기신론소
에 진여심과 더불어 아뢰야식, 제육의식을 분석하여 설명할 때 마음 하나하나에 주관과 객관이
열려서 거기서 보고 듣고 하는 모든 작용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원효대사는 아주
논리적인 글을 많이 썼기 때문에 진나논사의 후신이라는 말을 듣는다. 원효대사의 저술은 이와 같
이 두루두루 모든 것을 갖추어서 사상을 폈기 때문에 빈틈없고 알차다. 그러므로 원효사상은 해
가 갈수록 더 빛이 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효사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서 원효의 명저인 기신론소를 가지고 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기신론에 대해서 글을 쓴 글 중에서 이름을 떨쳤던 세 가지가 있다. 법장과 혜원 그리
고 원효의 저술을 말한다. 연대순으로 보면 혜원이 제일 먼저이고, 그 다음이 원효이고, 마지막
이 법장이다. 법장은 원효 보다 30년 정도 후세 사람으로 법장은 원효의 기신론소를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혜원과 법장의 기신론소는 계속 전해져 왔지만 원효의 기신론소는 중간에 사라졌
다가 다시 찾게 되었다.
앞으로 기신론소를 가지고 강의를 하게 될 텐데 오늘은 본문으로 들어가
지 않고 원효의 전기나 사상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법장의 소는 설명적이어서 원효의 소보다 조
금 쉬울 수는 있지만 원효의 소는 핵심적인 것만 들어있어 조금 딱딱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법장의 소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강원에서는 법장의 소를 가지고
공부한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 淄愎 법장과 혜원 그리고 원효 이 세 가지 소 가운데 원효의 소가
가장 훌륭한 저술이다. 우리는 이런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앞으로 원효 사상
을 펴는데 같이 기여했으면 한다.
* 출처/ http://ohmb.co.kr/
* 강의 / 대승불교원 오형근 박사(전동국대 불교대학원장)
* post- 운주유악(運籌帷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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