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자락이 흘러내려 이룬 용문산은 아름답다. 예천읍에서 이어진 928번 지방도로는 금곡천을 따라 굽이굽이 나 있어 들녘과 산을 고루 음미하며 가기에 더없이 좋다. 새말에서 산 쪽으로 접어들면 청신한 기운이 몸과 마음을 감싼다. 태조는 해마다 쌀 150석을 하사하였고 의종 때인 1165년에도 왕명으로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명종 때인 1171년에는 절문 밖 왼편 봉우리를 태자의 태(胎)를 묻는 곳으로 정하여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었다. 이때는 1170년에 일어난 무신난 이래 다시 무신들을 치려는 세력도 만만치 않아 정치 정세가 어수선한 때였다. 1173년에는 동북면 병마사였던 김보당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용문사에서는 3만 승려를 모아 대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두운의 법맥은 고려시대를 통해 영련,조응,자엄으로 이어졌다.
용문사(龍門寺) 일주문에 이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근래 새로 낸 길이고 오른쪽은 예부터 있던 길로, 해운루 밑으로 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예천군 산천조에서는 용문산을 이르기를 "신라 때에, 고승 두운(杜雲)이 이 산에 들어가서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고려 태조가 일찍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가는 길에 여기를 지나다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찾아갔다. 동구에 이르러 홀연히 용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용문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용문산 이름의 유래다.
두운은 두운동 태생의 사람으로 속성은 신씨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에 다녀온 뒤 이곳에 초막을 짓고 두운암이라는 암자를 내고 있었으니 신라 경문왕10년(870)의 일이다. 이때는 신라 하대로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체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할 때이다. 한편으로는 궁예의 태봉, 견훤의 후백제가 일어서서 이름하여 후삼국이 쟁패를 벌이기도 했다. 궁예의 휘하에 있던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하던 중에 이 절에 들렀는데 길목의 바위 위에 용이 앉아 있다가 왕건을 반겼다고 한다. 그것이 실제의 일이었다고 할 순 없으나, 왕건이 문경을 비롯하여 이 근방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던 것은 기록에도 전하는 일이다. 용의 환영이었건 이 지역민의 환영이었건 아무튼 그것이 큰 힘이 되었던 듯 왕건은 935년에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그리고 바로 그 이듬해인 936년에 옛일을 생각하고 절을 크게 일으켜주었다. 그때부터 용문사는 고려 왕조 내내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유지하며 번창의 길을 걸었다.
척불숭유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용문사는 왕실로부터 대접을 많이 받은 편이다. 세조3년(1457)에는 왕이 잡역을 감해주라는 명을 내렸는데 그 교지가 현재 보물 제7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종9년(1478)에는 소헌왕비의 태를 이곳에 안장하였으며 조선 후기인 정조7년(1738)에 와서도 문효세자의 태를 안장했을 정도로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유지했다. 그러다 조선 말기인 1835년 이후부터는 불에 타버려 전각을 다시 세운 기록이 여러 번 된다. 특히 1984년에는 보광명전,해운루,응향각,영남제일강원․요사․종무원 등 건물이 230평이나 타버렸다. 전각들을 새로 세우면서 용문사의 사역을 대대적으로 개축하는 바람에 주변의 나무들을 쳐내고 절 마당을 넓게 닦아내어, 조선시대의 학자 서거정이 이 절을 두고 "산이 깊어서 세속의 소란함이 끊어졌네"라고 했던 때의 아늑함과 포근함을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용문사는 보광명전이 본전이지만, 연륜은 그 동쪽에 있는 대장전이 높다. 보광명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응향각, 원통전, 산신각, 천불전이 조금씩 축을 달리 하면서도 거의 일직선을 이루면서 층층이 앉아 있다. 보광명전 동쪽으로는 대장전을 중심으로 진영당, 응진전, 명부전 등이 오순도순 모여 있다.
전체적으로 경사진 비탈에 선 절이라 계단이 많다. 몇 계단 올라 회전문을 지나면 다시 높다란 석축이 있고 그 위에 강당인 해운루가 앉았다. 이어지는 일직선 상에는 최근에 새로 맞춰 온 듯한 석탑의 푸르뎅뎅한 빛이 어딘지 낯설어서, 새로 정비한 품이 고찰다운 느낌을 주지 못한다. 다시 정비한 높다란 석축 위에 한껏 권위를 세우며 앉아 있는 보광명전은 용문사의 주요 전각이기는 하나, 1984년 용문사에 큰불이 난뒤 새로 세운 건물이다. 안에는 철조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데 금분을 새로 입혀서인지 철불의 강인한 맛은 느끼기 어렵다. 철불 좌우에는 소조석가여래와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다.
발길을 오른쪽으로 돌려 대장전에 이르면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소리치지 않는 위엄의 느낌이 엄습한다. 대장전은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 중기에 지어졌다. 보물 제145호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아한 맞배지붕집이다. 옛맛을 느끼고 싶다면 회전문에서 해운루를 지나 절마당으로 들어설 것이 아니라 방향을 틀어서 자운루(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9호)밑으로 해서 대장전을 바라보면서 가는 것이 더 낫다. 몸가짐을 추스르고 대장전 안에 들어서면 가운데에 목조의 석가여래와 문수?보현 보살이 굽어보고 있다. 그 뒤에는 화려하지만 결코 지나쳐 보이지는 않는 목각탱이 법당 안을 환하게 밝힌다. 그 양쪽으로는 기둥 같기도 하고 작은 건물 같기도 한 윤장대가 벌려 서 있다.
대장전 옆쪽의 긴 건물인 진영당에는 두운선사, 청허당 대선사 등 용문사에 주석했던 고승들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그 동쪽에 있는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자그마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응진전 안에는 소조석가여래가 정좌한 가운데 양쪽으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협시하고, 그 옆으로 십육나한이 벌려 서 있다. 응진전에서 좀더 동북쪽으로 오르면 명부전이 있다. 목조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있는 명부시왕들은 아무리 지옥에서 받을 벌로 위협한다고 해도 고개 숙이게 될 것 같지 않은 편안한 얼굴들이니, 조선 후기 불교가 가졌던 친근성과 민중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그밖에도 용문사에는 각 시대를 느끼게 해주는 탱화들이 많이 있다. 1709년에 조성되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팔상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4폭의 팔상도를 비롯하여 숙종31년(1705)에 조성된 것으로 삼존의 불보살과 2대제자가 그려진 장대한 괘불(1,070×675cm)이 있다. 그 외에도 19세기 중엽에 그려진 많은 탱화들 가운데에는 털모자를 쓴 사냥꾼 모습과 뿔이 난 도깨비로 여겨지는 도상 들이 그려진 신중탱, 깃털 부채를 쥐고 영지가 든 바구니를 손에 든 인자한 모습으로 다른 신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산신이 그려진 신중탱 등이 있어서 조선 후기 불화의 다양하고 생생한 측면을 보여준다.
대장전의 윤장대와 목각탱
세월이라는 것, 연륜이라는 것이 지닌 무게는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대장전 앞에 서면 이 자그마한 건물이 주는 무게가 그런 질문을 품게 한다. 압박하지 않는, 무엇이든 품어주는 권의의 느낌이 주는 질문이다.
용문사 중수비에 따르면 대장전을 처음 설치한 것은 1173년이다. 그때에 삼만승재(三萬僧齋)를 열고 대장전을 새로 지었으며 그 안에 윤장대 2좌를 설치했다고 한다. 1179년에 중수공사가 완공되었을 때에는 구산의 학승 500여 명을 모아 50일간에 걸친 법회도 열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670년에 중수했다는 사적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적어도 300년은 넘을 것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 작은 건물은 조선 초기 건물들의 특징인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맞배지붕집들이 대개 주심포식으로 기둥과 지붕을 연결한 반면, 이 집은 기둥과 기둥 사이사이에 공포가 들어선 다포계를 취했다. 이같은 모습은 건물이 커져가면서 주심포계에서 다포계로 변화하는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맞배지붕이 주는 단아함과 다포계 결구 방식이 주는 화려함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밖에서보다 더 은근한 화려함을 느끼게 된다. 천장의 반자틀에도 단청이 화려하게 입혀지고 대들보와 종보 사이의 화반에도 풀무늬가 새겨졌으며, 대들보 위의 용은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돼 있는 등 군데군데에 불전을 화려하게 장식하려던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 화려함의 초점은 당연히 가운데에 모신 삼존불과 그 후불탱으로 모아진다. 꼭 맞는 목조대좌 위에 앉은 목조삼존불의 모습에서 이 불상들이 제모습을 잘 지켜내며 세월을 견뎌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삼존불과 꼭 어울리는 목각후불탱이 받치고 있어 더욱 권위가 사는 듯하다.
이 목각후불탱의 하단에는 '康熙二十三秊甲子秊'이라는 먹글씨가 씌어 있다. 이로 인해 이 목각탱의 조성연대가 조선 숙종 10년(1684)임을 알 수 있으니, 이렇게 연대를 알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더구나 이 목각탱은 구도와 조각 솜씨가 어떤 모본을 본뜬 것이 아니라 매우 창의적이다. 그래서인지 보물 제9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주 남장사 관음전 목각탱의 모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이 목각탱은, 전체적으로는 가운데 본존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이 중단과 상단에서 에워싸고 그 양옆으로는 석가의 2대 제자인 아난과 가섭 존자가 있으며 그 모두를 맨 아래쪽의 사천왕이 떠받드는 모습으로 상.중.하 삼단구도를 이루고 있다. 좌우로는 대칭구도이지만, 인물의 자세들이 딱딱하지 않고 인물 사이에 장식문양들이 있어 엄격한 대칭의 도식성을 벗어나 정연한 가운데 자연스러움을 만들고 있다. 특히 삼존불 뒤쪽에 있는 사천왕은 마치 엄마 등에 업힌 어린아이가 고개를 비쭉 내밀고 어깨 너머로 보려 하듯이 석가여래 옆으로 몸을 한껏 틀어 제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인간적인 맛까지 느끼게 한다. 게다가 빛의 반사가 없이 차분히 가라앉은 금단청은 '금단청이라도 현란하지 않고 이처럼 고상한 맛을 줄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삼존불이 정좌한 양쪽으로는 마치 대장전을 떠받든 듯한 두 기둥이 버티고 있으니 이를 윤장대(輪藏臺)라고 한다. 윤장대는 마룻바닥에 8각을 뚫고 축을 세워 천장에 고정시켜 놓고, 그 축을 중심으로 보궁을 축소한 듯한 8각의 원당형 당우를 만들어놓은 구조물이다. 크기는 높이가 4.2m, 둘레가 3.15m이다. 윤장대 안에 경전을 넣어두고 바깥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연자방아 돌리듯이 돌릴 수 있게 되어 있다. 윤장대를 돌리면서 예불하는 전경신앙(轉經信仰)의 예를 보여주는 귀중한 보기이다.
불가에서 8각은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8각의 각 면마다 문을 만들어 경전을 여닫을 수 있게 했고, 문에는 조각을 베풀었다. 특히 서쪽 윤장대 문에는 화려한 꽃살 장식이 베풀어진 반면 동쪽 윤장대문은 단아한 빗살이어서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양쪽 모두 빽빽한 포작을 올리고 지붕 처마처럼 구성하여 마치 서고(書庫)로서 전각들을 법당 안에 들여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1188년 세운 용문사 중수비에 따르면 1173년에 삼만승재를 베풀었을 때 윤대장(輪大藏)2좌와 불당 3칸을 두어 7일간 법회를 일으켰다고 했으니 처음의 모습은 이미 그때 자리잡았을 것이며, 지금의 모습은 대장전을 중수한 1670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윤장대에 관한 몇몇 기록이나 파손된 예는 있지만 이처럼 완전하게 제자리에 보존된 예는 이 용문사의 윤장대뿐이다. 보물 제684호로 지정된 귀중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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