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때 9개의 절이 있었던 한강변의 구암서원(龜岩書院) 터
서원은 유학을 장려한 조선왕조의 정책에 따라 각 지방에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을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한편 청소년들을 모아 교육하는 곳이었다. 이 서원은 조선 11대 왕인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때 유학자 안향(安珦)을 모시는 「백운동(白雲洞) 서원」을 세운 것에서 기원한다.
그 후 명종은 이퇴계의 건의에 따라 백운동서원에 「소수(紹修)서원」이라는 현판을 써서 하사하고 책, 노비, 토지 등을 주어 장려했다.
이에 따라 선조 때는 124개, 숙종 때는 1개 도(道)에 8~90개의 서원이 우후죽순격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서원은 국가로부터 갖가지 특권을 받아 그 폐단이 심하였다.
「서원에 딸린 논밭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지.」
「그 뿐이야. 상민들이 군역(軍役)을 기피하기 위해 원노(院奴)로 들어간다지 않아.」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는군. 게다가 유생들은 향교(鄕校)보다 서원에 들어가 공부는 하지 않고 당파에 가담하고, 죄없는 양민들을 끌어다가 재산을 빼앗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지. 쯧쯧.....」
이에 인조와 효종은 서원 설치를 제약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정조 때는 전국에 650개의 서원이 있었다.
「혹시 서울에도 서원이 설치되어 있었나요.」
「음, 조선시대 서울에는 서원이 없었지 그런데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난 뒤에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경기도에 있었던 서원이 서울에 편입되었지.」
「그렇다면 어떤 서원들이 서울에 있게 된 셈인가요.」
「우선 도봉구 도봉동에 세워진 도봉(道峰)서원을 들 수 있겠지. 그리고 영등포구 노량진동의 민절(愍節)서원과 사충(四忠)서원이 있었고, 한강대교 남쪽의 본동에는 노강(鷺江)서원, 강동구의 구암(龜岩)서원이 있었지.」
앞의 대화처럼 「도봉서원」은 선조 6년(1573)에 양주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세웠다. 남언경은 조광조(趙光祖)가 일찍부터 이곳의 풍경을 즐겨 자주 찾았기 때문에 세운 것이다.
그러자 1년 뒤에 선조는 서원 현판을 써 주었으므로 이른바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고, 숙종 23년(1697)에는 송시렬을 모셨다. 그 후 조선말 고종 때 폐쇄되었다가 광복 후에 복원되어 현재 유일하게 서울에 남아있다.
「민절서원」은 숙종 8년(1682)에 세워졌다. 이 서원은 세조 때 단종을 왕위로 복위시키려다 발각되어 새남터의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진 사육신(死六臣)을 모셨다.
그리고 「사충서원」도 노량진동에 있었다. 이 서원은 조선 중기 경종 때 노론파의 4대신인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이이명(李頤命)이 모셔져 있었다.
즉 영조가 이들 4대신을 위해 서원을 짓게 한 것이다.
경종 1년(1721).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은 몸이 허약한데다가 후사가 없었다. 이에 4대신들은 왕에게 나아가 이복동생인 연잉군(후의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토록 했다. 그런데 이들 4대신은 연잉군의 대리청정(代理聽政) 조치에는 오히려 반대하였다. 그러자 반대파들은 이들을 모함하여 중죄인을 만든뒤 귀양 보냈다가 처형시켰다.
노강(鷺江)서원은 숙종이 충신 박태보(朴泰輔)를 위해 세운 것이다. 박태보는 숙종 15년(1689)에 국왕이 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세자로 삼고, 이어서 인현왕후를 폐위하려고 하자 이를 부당하다고 반대하다가 고문 끝에 진도로 귀양하는 길에 이곳 친구 집에서 묵다가 숨을 거두었다.
구암서원은 강동구 암사동 산 23번지, 즉 현재 한강변 암사수원지 취수장 서쪽 언덕 위에 있었다. 이 서원은 조선중기 현종 8년(1667)에 고려말과 조선왕조 때 남다른 충의와 행실을 지닌 이집(李集), 이양중(李養中), 정성근(鄭誠謹), 정엽(鄭曄), 오윤겸(吳允謙), 임숙영(任叔英) 등 6사람을 모셨다.
구암서원이 세워져 있던 곳은 신라 때 9개의 절이 있어 구암사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 절이 강변 바위에 위치했으므로 「바윗절」이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백중사(伯仲寺)는 하진첩(下津站) 동쪽에 있다.」
고 했으므로 암사는 백중사로 고쳐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곳 서원 터에는 조선말 고종 33년(1896)에 이집선생을 제사 드렸던 자리임을 밝힌 비석이 남아있는가 하면 큰 주춧돌이 남아있다. 고려말 둔촌동 산 328번지의 1호에 일시 이집(李集)선생이 살았다 하여 둔촌동의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이집선생은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가 된다.
이집선생은 충목왕 3년(1347)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가 정몽주, 이색, 이숭인 등과 더불어 서로 공경하여 교유하였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공민왕 재위 때 권력을 장악한 중 신돈(辛旽)을 탄핵하였다. 그러자 신돈은 그를 처형하려고 포살령(捕殺令)을 내렸다.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집선생은 부친 이당(李唐)을 등에 업고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이집선생은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으면서 천신만고 끝에 경상도 영천(永川)에 사는 친우 집에 도착하였다. 친우 최원도(崔元道)는 사간(司諫)을 지낸 사람인데 이집선생이 부친과 함께 와서 은신하겠다고 부탁하자 사람들 눈을 피해 자기집 방 다락에 숨겼다.
당시 최원도의 집에는 19살의 제비라는 예쁜 이름의 계집종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주인 최원도가 밥을 세 그릇 씩 먹고 방에서 용변을 보는 등 반 미치광이 행세를 하기 시작했으므로 제비는 물론 모든 집안식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발광의 시중을 제비가 맡고 있을 때 주인 마님이 그를 불러
「얘야 아무래도 주인 양반의 거동이 이상하구나. 그러니 네가 은밀히 동정을 살펴 보아라.」
「예, 분부대로 알아 보겠습니다.」
제비는 마님의 말대로 최원도의 방을 염탐해 보니, 다락 속에 두 사람을 숨겨 놓고 이를 밖에 알리지 않으려고 반 미치광이 짓을 벌인 것을 마침내 알아냈다.
특히 다락 속에 숨어있는 두 사람이 다름 아닌 온 나라에 직간(直諫) 신하로 소문난 이집과 그의 부친 이당임을 인지했다. 즉 최원도는 2년 동안 다락 안에 이들을 숨긴 것을 은폐하기 위해 반 미치광이 행세를 연출하였으니 그야말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우정이었다.
그러자 부인은 이 사실을 염탐한 제비가 혹시 이 내용을 외부에 누설하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이에 영리하고 충직한 제비는 주인마님의 걱정하는 모습을 눈치 채고 마님 앞에 나아가
「마님,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쇤네에게 사약(死藥)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이에 주인 마님이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제비가 눈물을 흘리면서 애걸하자 주인마님은 마침내 그의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되어 울면서 돌아앉아 사약을 내렸다. 그러자 제비는 큰 절을 한 뒤 사약을 들어 마셨다.
이처럼 최원도의 우정과 의비(義婢) 제비의 절의로 무사히 은거했던 이집선생은 공민왕 20년(1371)에 신돈이 주살되자 무사히 개경으로 돌아와 복직되었다.(*)
구암서원 터에 새로 세운 구암정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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