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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만유는 인연생기(因緣生起)하고 있다는 연기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이며, 또한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사된 것을 여읜 중정(中正)한 도(道)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연기를 중도(中道)라고 부릅니다. 중도(中道)라고 하면 얼른 생각하기에는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나 혹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삼자를 연상할 지 모르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제 중도에 대한 이해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하여 앞에 나온 연기법과 삼법인설을 상기하여 가면서 이를 논해 보기로 합니다. 모든 현상계 제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상의성 관계에 있기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거나 항상됨이 없이 인연으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도 따로 독립되어 존재할 수는 없으며, 제법(諸法)은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입니다. 그러나 또한 제법(諸法)은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기에 인연생기(因緣生起)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나무도 풀도 사람도 그것은 엄연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라는 것, 풀이라는 것, 사람이라는 것도 그것은 결코 독립적이고 영원한 존재는 아닙니다. 불변(不變)의 실체(實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불변의 실체라고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풀이던지 나무든지 사람이든 지간에 다른 일체의 도움도 없이 홀로 독립되어 언제까지나 존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는 인연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고 있으며, 나무다 풀이다 사람이다 하는 것은 어떠한 인연의 결합상태를 그것과 다른 인연의 결합상태와 구분하여 부르는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계에 잇는 모든 존재는 무아이고 무상이기에 실로 이것이다 하여 따로 세울 것도 항상된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아이고 무상이기에 제법은 '무(無)'에서 끝나 버리는 것인가? 그것은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제법(諸法)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인연으로 결합된 모든 것은 자기인연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고 하나 그것은 영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결합의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며 찰나찰나 생멸변화한다고 하나 그것은 단멸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계속 이어져 가는 것 입니다. 이렇게 볼 때 또한 제법(諸法)은 무아다 무상이다 하여 그것이 결코 정말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제법(諸法)은 무아(無我)하고 무상(無常)한 것이므로 실로 있다던 지 항상된다던지 할 아무런 것도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제법(諸法)은 완전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아이며 무상이기에 엄연히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인연생기하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상비단(非常非斷)이라고 표현하는데 비유비무(非有非無)란 제법(諸法)은 실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유·무(有·無)의 상대적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뜻에서 일컬어지는 말이요, 비상비단(非常非斷)이란 제법(諸法)은 항상(恒常)한다고도 단멸(斷滅)한다고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상·단(常·斷)의 상대적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뜻에서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하여 유무(有無)를 떠나서 비유비무(非有非無)를 따로 세우고 상단(常斷)을 떠나서 비상비단(非常非斷)을 따로 세워서도 안됩니다. 이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상비단(非常非斷)의 도리를 우리는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하는 것을 중도설이라고 하며, 이것은 연기(緣起)로부터 얻어진 결론으로 우주 인생의 실상(實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기인중도(緣起印中道)라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우주 인생의 실상인 중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중생인 우리는 이러한 실상속에서 살면서도 가끔은 이 실상 도리에 위배된 오류를 범하는 수가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첫째로 '이 세계는 실로 있는 것이다, 내 영혼은 불멸이다, 저 어디엔 가는 영원불멸의 세계가있다'는 등의 유아(有我) 유상(有常)에 치우친 유견(有見)(참으로 있다는 생각), 상견(常見)(항상 하다는 생각)을 내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이 세계는 실로 없는 것이다, 죽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난다, 사후의 세계도 없는 것이다, 현세만이 있을 뿐이다'등의 무아(無我) 무상(無常) 그 자체에 빠져 무견(無見)(참으로 없다는 생각), 단견(斷見)(단멸하고 만다는 생각)을 내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중생의 미혹과 집착에서 나온 그릇된 견해입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있어 영원한 것도 없고 참으로 없어 단멸되어 버리는 것도 없습니다. 제법은 비유비무(非有非無)이고 비상비단(非常非斷)이기에 유(有)인 동시에 무(無)이고 무(無)인 동시에 유(有)이며 상(常)인 동시에 단(斷)이고, 단(斷)인 동시에 상(常)인 것입니다. 따라서 유·상(有·常)의 일변(一邊)에 치우쳐 그런 것이 있다 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종래 그런 것이 없고 그렇게 될 수 없기에 욕망과 불만만이 늘어가 모든 것은 괴로움이 될 뿐이요, 반대로 무·단(無·斷)의 일변(一邊)에 치우쳐 그 자체에 빠진다면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지 않기에 스스로 허무와 포기만이 늘어가 이 또한 괴로움이 될 뿐인 것입니다.(일체개고(一切皆苦))우리는 어느 일변(一邊)에 치우쳐서도 안되며, 이에 대해 경에는「'일체는 유(有)다' 라고 하는 것은 일변(一邊)이다. '일체는 무(無)다'라고 하는 것은 제 이(二)의 변(邊)이다. 가전연이여, 여래는 이 이변(二變)을 여의고 중(中)에 의해 법(法)을 설하나니 무명(無明)에 의해 行이 있고 .....」(상응부경 3) 「한 출가자가 부처님께 '유아(有我)입니까.?'하고 물었으나 이에 묵묵부답하셨다. 이와 같이 재삼 거듭하여 물었으나 모두 답하지 않으셨다. 아난이 그 이유를 물으니 부처님께서는 "내가 만일 유아(有我)라 한다면 그는 유아(有我)의 사견(邪見)만을 더 할 것이요. 만일 무아(無我)라고 한다면 먼저의 의혹에 의혹만 더 해 줄뿐이다. 만약 앞과 같이 유아(有我)라 한다면 이것은 상견(常見)이요 이제 무아(無我)라 한다면 이것은 단견(斷見)이다. 여래는 이 이변(二變)을 여의고 중(中)에 처하여 법을 설하시니 이것이 소위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말미암아 이것이 일어남(生)이니 곧 무상(無常)으로 연(緣)하여 행(行)이 있고...'라고 말씀 하셨다.」(잡아함 권 34)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중도설(中道說)에 대하여 알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이치를 잘 살려가야만 합니다. 즉, 세계와의 상의성 관계가 나를 찾되 나로서의 개성을 잃지 않고 나의 개성을 잃지 않는다고 하여 세계와의 상의성관계를 저버리지 않아 나를 온전히 살리고 그리하여 이 모든 우주 인생을 청정하게 장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涅槃寂靜) 이런 실천의 행동을 우리는 중도설(中道說)이라 하는데 원시경전에는 이 중도설이 팔정도(八正道)로서 나타나 있습니다. |
![]() 팔정도(八正道)란 중도(中道)의 이치를 여실히 파악한 후에 나오는 실천적 중도행(中道行)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당시의 인도 사상계로 봐서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연기(緣起)의 도리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설해 진 것이 사성제(四聖諦)라고 하는데 이 사성제(四聖諦)중 도(道)의 부분을 자세히 설명해 놓은 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八正道)는 '8가지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道)'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단수형태로 불리는 것은 8개항목이 한 성도(聖道)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8개가 모두 협력함으로써 인격완성이라고 하는 하나의 목적에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① 정견(正見) 올바른 견해, 즉 불교의 올바른 세계관, 인생관을 가르키는 것이다. 즉 연기(緣起)라든가 사제(四諦)에 관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자의 지혜이기 때문에 지혜라고 부르지만 성자가 되지 못한 범부에게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正見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종교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어떠한 일을 할 때 그 일에 대한 올바른 목적과 그것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이 正見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올바른 목적이나 계획 없이, 혹은 그 일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없이는 어떠한 일에도 착수할 수 없으며 완성의 가능성도 없을 것이다. 바라문교(敎)에서는 개인에게는 아(我)라는 중심생명이 있어 我가 생명의 근원이요 활동체라고 하고 또 우주에는 범(梵,Brahman)이라는 중심생명이 있어 이 범(梵)이 일체의 현상계를 꿰뚫는 근본 원리가 되며, 동시에 같은 이름의 신(神) 즉 범(梵)이 있어서 온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합니다. 그리고 梵과 我는 그 본질 면에서는 같은 범아일여(梵我一如)이므로 아(我)를 알면 곧 범을 알아 아범(我梵)의 본연(本然)의 상태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상태가 해탈이며, 이상적인 마음의 경지로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요가(Yoga), 선정(禪定,Dhyana)을 닦아야 한다는 수정주의(修定主義)를 내세움으로써 유아(有我) 유상(有常)에 치우친 유견(有見) 상견(常見)의 입장에 서서 실천수행하고 있습니다. ② 정사유(正思惟) 올바른 사고방식이며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이것은 자신의 입장을 잘 생각하고, 또 자기의 목적수행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 그에 대한 바른 마음가짐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른 지혜의 아래에서 끊임없이 바르게 사유(思惟)하는 가운데 이렇게 해야할지, 어떻게 하면 그 일을 가장 잘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원시경전에 기록된 정사유(正思惟)의 해석은 노여워하는 마음, 죽이고자 하는 마음, 세속적인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출가자에게 어울리는 부드럽고 평화로운 마음, 자애로운 마음, 더러움을 떠난 청정한 마음을 갖도록 끊임없이 생각하고 애쓰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 사상계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를 비롯하여 62見 363見이 있었다고 하여 다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모든 것은 사대 지(地)·수(水)·화(火)·풍(風)등의 어떤 실체인 요소들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요소가 흩어지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우리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느 일부는 순세파(順世派)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인간의 모든 고통은 정신보다도 육체에 있는 것이므로 이 고통을 이겨내는데는 육체의 욕구에 순응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통의 근원인 육체를 강압하므로써 정신의 자재를 얻을 수 있다는 적취설(積聚說)에 입각한 고행주의(苦行主義)를 내세움으로써 요소의 실체를 인정하기는 하나 결국은 무아(無我) 무상(無常)에 치우친 무견(無見) 단견(斷見)의 입장에 서서 그에 따라 실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친 것으로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석존께서는 정각(正覺)을 이루기 전 이미 이 두 가지의 수행방법을 모두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정각(正覺)을 성취하신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에 의한 비상비무(非常非無), 비상비단(非常非斷)의 중도설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것이었으며, 석존께서는 이들과 대립하기 위하여 이런 중도설을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석존께서 이 세상의 이치를 정확하게 깨달으시고 보니, 그들의 주장이 이처럼 틀리게 판명된 것입니다. 따라서 석존께서 말씀하신 中道行으로서의 팔정도는 정말로 새롭고 해탈에 이르는 길이 안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③ 정어(正語) 올바른 언어(言語)행위이다. 바른 견해나 사고방식 아래에서 이루어진 言語동작은 자연히 바른 것이 됩니다. 정어(正語)의 구체적인 예로 망어(妄語), 악어(惡語), 양설(兩舌), 기어(綺語)등 4가지의 금하는 것이 제시되는데 적극적으로는 타인을 올바르게 지도, 계몽하거나, 다른 사람을 칭찬해주고 북돋아 주거나, 성실한 말로 남을 대하거나, 필요할 때 필요한 말을 하는 등의 올바른 언어(言語) 행위를 가르킨다고 보여집니다. 우리의 불화나 투쟁, 반목, 시기, 등은 그릇된 言語 행위로부터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올바른 언어(言語) 행위에 의해서 자타의 선의(善意)를 소통시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매우 필요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의 생각을 밖으로 표현함에 말과 몸으로써 하는데 몸으로써의 행위보다는 말로써의 행위가 앞섭니다. 따라서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르게 생각한 바를 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만일 생각한 바와 다르게 말을 하거나 혹은 아무런 이렇다 할 생각도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말을 한다거나 한다면 이는 결코 바른말 좋은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른 생각과 바른말을 하여야합니다. 이것이 정어(正語)라고 합니다. ④ 정업(正業) 올바른 신체적(身體的)행위이다. 우리의 의지, 심정(의업:意業)은 반드시 언어적 행위(어업:語業), 또는 신체적 행위(신업:身業)를 통해 외부로 표출됩니다. 따라서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의 의업(意業)에서는 자연히 정어(正語)나 정업(正業)에 대한 해석은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생명을 구조하거나 재물의 시여(施與:남에게 조건 없이 그저 물건을 베풀어 줌), 자선(慈善)을 행하거나 인륜도덕의 도를 스스로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것을 권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말과 몸인데 말이 바르면 행동도 바로 해야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언행일치(言行一致)란 말도 있거니와 말과 행동이 달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정견(正見) 다음에 마음으로써의 정사(正思), 입으로써의 정어(正語), 몸으로써의 정업(正業)의 순서로 되어 잇는 것은 우리가 행동하고 잇는 모든 기관을 통틀어 나누면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있어야 말로 표현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는 몸으로써 행동하기 때문에 정해진 자연스러운 순서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원래 업(業)이란 말은 모든 신(身)·구(口)·의(意)의 행위를 가르키는 말로 모든 행위는 반드시 원인이 되어 그에 따른 결과를 초래할 세력이 있으므로 일컫는 말인데 여기에서의 정업(正業)이란 의업(意業)으로써의 정사(正思)와 구업(口業)으로서의 정어가 이미 앞에 나와있기 때문에 身業을 가르키는 말로 표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⑤ 정명(正命) 올바른 생활이다. 명(命)이라고 하는 것은 활명(活命) 즉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사어(邪語), 사업(邪業)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다시 여기에 덧붙여 올바른 하루하루의 생활 법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따로 분리시켜 살 수 없고, 삿된 견해(見解)가져 신(身)·구(口)·의(意)로써 삿된 업을 지어온 것이 우리들의 생활이었다면 이제 바른 견해 즉 지혜(正見)를 가지고 마음(意)으로는 바르게 생각하고(正思), 입으로는 바르게 말을 하고 몸으로는 바르게 행동하여 이것이 합쳐진 전체의 우리생활이 바르도록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행동을 하는 올바른 생활법(生活法)을 정명(正命)이라 고합니다 출가자의 정명(正命)으로는 출가자가 재가자의 신앙보시에 의존하여 주야 6시간을 규칙적으로 보내는 것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⑥ 정정진(正精進) 올바른 노력, 올바른 용기를 말한다. 원시경전에서는 이 올바른 노력을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의하면 먼저 우리의 이상, 목적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것을 선(善)이라고 하고, 반대로 장애가 되는 것을 악(惡)이라고 하는데 이 선(善)과 악(惡)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정진(精進)노력인가를 네 방면에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선(善)은 얻도록 노력하며, 존재하는 악(惡)은 소멸시키며, 아직 존재하지 않은 악(惡)은 이후에도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등입니다. 우리는 정견(正見)에서 정명(正命)까지를 잘 한다하여도 그것이 일순간이 되어서는 안돼는 것이며, 끝없이 이어져야만 합니다. 끝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도록 하는 정명(正命)의 생활을 정정진(正精進)이라고 합니다. ⑦ 정념(正念) 바르게 올바른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자신 및 주변의 입장을 항상 염두에 두어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자아(自我)에 집착하는 마음이 아니고 정견(正見) 내지 정정(正定)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 자신이나 주위의 입장을 올바르게 알아 항상 그것에 유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올바른 의식(意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념(正念)은 불교에서는 정지(正知)와 함께 서술되는데 이 정지(正知)와 정념(正念)은 대체로 유사한 심정을 가르킨다고 보여집니다. 정지(正知)는 자신의 일상적인 동작, 태도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을 끊임없이 의식, 반성하는 것이고, 정념(正念)은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한 것임을 항상 염두에 두어 잊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정견(正見)을 얻은 우리는 정사(正思)에서 그를 깊이 새겨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으로 외부에 표출하되 그것이 전부 바른 것이고 보면 마음이 다른 곳에 쏠릴 리가 없이 오로지 일심으로 바른 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 바른 것만을 생각하고 그 바른 것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을 정념(正念)이라고 합니다. ⑧ 정정(正定) 올바른 선정(禪定)으로 정신통일의 상태를 지속함을 말한다. 이것은 반드시 좌선(坐禪)에 의한 정신통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일상생활에서도 어떤 하나에 열중하여 삼매(三昧)에 드는 것은 여기에 해당됩니다. 물론 정정(正定)의 해석에서는 초선(初禪)에서 제 사선(四禪) 까지의 정식 선정(禪定)을 들고 있으나, 이와 같은 특별한 선정(禪定)은 전문가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식 선정(禪定)이 아닌, 정도가 낮은 정신 통일도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큰 도움이 됩니다.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하는 몽매하지 않는 마음도, 무념무상(無念無想)이라고 하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 마음의 상태도 모두 정정(正定)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특별히 正定을 훈련하지 않는다 해도 어떤 일에 열중하여 꿈속에서까지 그 일을 하게 되면 자연히 정정(正定)의 상태를 얻을 수 있다. 정정(正定)은 정념(正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이 완전히 안정된 일심삼매(一心三昧)를 말합니다. 모든 것이 바르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만일 마음에 조금이라도 산란함이 있다면 정견(正見)부터가 이미 흔들리므로 만사가 바른 것이 될 수 없으며, 이 마음에 아무런 산란함이 없는 것을 정정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정견과 정정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팔지(八支)는 정견(正見)에서 출발하여 정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정정은 다시 정견(正見)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 팔지(八支)는 시작과 끝이 따로 없이 입체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끝으로 바르다(正)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알아봅시다. 제일 처음의 정견(正見)이란 곧 세상의 이치를 바로 보고 바로 아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바른 이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서도 논증하여 본 바와 같이 다름 아닌 '중도(中道)'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견(正見)의 정(正)은 그 내용이 곧 중도(中道)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머지 팔지(八支)는 중도(中道)로 생각하는 것이므로 정사(正思)요, 중도(中道)로 말하는 것이므로 정어(正語)요,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이므로 정업(正業)이요, 중도(中道)로 생활하는 것이므로 정명(正命)이요, 중도(中道)로 생활을 쉬지 않고 계속하자는 것이 정정진(正精進)이요, 중도(中道)만을 오로지 생각하고 잊지 말자는 것이 정념(正念)이요, 중도(中道)로 직접 체득하자는 것이 정정(正定)인 것으로 팔정도(八正道)의 모든 행(行)은 전부 중도(中道)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팔정도(八正道)란 곧 중도(中道)를 실천에 옮기는 행법(行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정도(八正道)를 실천적(實踐的) 중도행(中道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출처 : 불교와문학마당
글쓴이 : 코스모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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