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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설(三法印) 삼법인은 연기법이 석존의 깨달음의 내용임에 대하여 석존께서 이 연기법을 기본으로 하여 온 우주의 인생에 내린 여실(如實)한 단안(斷案)인 동시에 대외적으로 표방한 석존사상의 삼대요강 (三大要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법인(三法印)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셋을 말하는데 이를 각기 법인(法印)이라 하는 이유는 법(法)은 법리(法理)라는 뜻이며,인(印)은 인증(印證)의 뜻으로 결정코 확실히 그리하여 다시 변경할 수 없는 리법(理法)이라는 뜻에서입니다. 또한 이 삼법인을 말함에는 열반적정(涅槃寂靜)대신 일체개고인(一切皆苦印)를 넣어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삼법인을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삼법인을 모두 연기설과 결부시켜 알아보면서 이에 따라 종합적인 결론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1.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행(行)이라 함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을 가르키는 말이니, 제행(諸行)이라 함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상(無常)이란 말은 시간적으로 보아 항상됨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할 때에는 모든 현상계 사물은 그 어느 하나도 시간적인 면에서 볼 때 항상한 것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떠가는 구름, 그 아래로 흐르는 계곡의 물, 그리고 새소리, 물소리는 물론 봄꽃, 겨울, 눈, 부귀 영화 우리인생까지도 어느 하나 시간적으로 봐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있는가. 실로 이 모든 것은 인연으로 합해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앞에 나온 연기의 정의 볼 것 같으면 현상계 만유의 시간적 상의성 관계를 나타낸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현상계 만유의 시간적으로 보아서 하나도 독립됨이 없이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는 원리에 의해 인연생기(因緣生起)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하여 이루어지고 또 흩어지고 하는 이 현상계 만유(諸行)는 결국 무상(無常)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 현상계에 시간적으로 보아서 영원한 것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법인(法印)이 될 수 없겠지만,물·심(物·心) 어느 면으로 보던지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것은 그렇지 않기에 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은 법인으로 확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상(無常)에는 일기무상(一期無常)과 찰나무상(刹那無常)의 두 가지가 있는데 .. ① 일기무상(一期無常)이란 어느 정도의 기간에 걸쳐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네 가지 과정을 거치고 생물(生物)은 생·장·노·사(生·長·老·死)의 네 가지의과정을 거치는 것을 말하고. ② 이러한 것도 자세히 보면 시시각각 찰나찰나 생멸변화하니 찰나무상(刹那無常)이란 곧 이를 말하는 것이다. 2.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제법무아인법(諸法無我印法)이라 함은 행(行)과 같은 의미로 쓰인 말이고 아(我)라는 것은 어떤 고정된 실체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할 때에는 현상계 만유는 공간적으로 보아 아무런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현상계의 모든 만유가 시간적으로 영원치가 않다면 거기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어떤 사물에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물은 결코 변할 수가 없으며 그러면 시간적으로도 영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인연소생(因緣所生)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도 고정된 것도 실체도 다 없는 것입니다. 이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연기법으로 보면 모든 현상계 만유의 공간적 상의성 관계를 나타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에 해당됩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과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 二印은 연기의 정의를 그대로 표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즉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은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를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은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를 표명한 것입니다.그리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주인생에 대한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뒤에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은 주관적인 法印이 따라붙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의 연기법의 설명에서도 나온바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우주의 진리를 그저 객관적으로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고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이 행한바와 같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떠나게 하고자 함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머지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고찰하여 가면서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3. 일체개고인(一切皆苦印) 일체개고라 함은 모든 것은 다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객관적 존재를 존재 그대로 놓고 본다면 그것은 고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객관적 존재가 고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에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종류의 주관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①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존재를 놓고 유상(有常)이요 유아(有我)이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헛된 욕망이며, 아무리 사물에 대하여 좋아하는 마음을 내고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해도 그러려는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은 반드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이 욕망의 불만족으로 인하여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것에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던 정신적인 것이던 마찬가지이며, 재물이나 권력 등을 영원히 자기것인양 허욕애 사로 잡혀 동분서주하다가 패가망신하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②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존재를 놓고 무상·무아(無常·無我) 그 자체에 빠져 어차피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라 하여 모든 것에 희망을 잃어버리거나 자포자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인생(人生) 무상(無常)이다"라고 탄식하거나 순간적이나마 염세주의에 사로잡히거나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순간 그 사람에겐 모든 것이 귀찮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나타나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따라서 이것이 계속되면 될수록 그의 생(生)이란 점점 더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고 맙니다. 위에 말한 두 가지 이유는 모두가 극단에 치우친 것으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도리를 제대로 살려나가지 못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 도리를 가장 적절하게 살려 나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 인생이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무상(無常)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결코 서글픈 감정을 유발하거나 눈물을 글썽이게 할 성질의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인생이 무상(無常)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 없는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이 무상(無常)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만일 인생이 유상(有常)하고 유아(有我)하다면 우리는 아무런 진보나 발전의 여지도 없이 언제까지나 이런 고통받는 중생인 인간으로서 남아 있어야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인생 또한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룩한 인연을 잘 관찰하여 그 인(因)과 연(緣)을 제거함으로써 고통받는 중생으로서 남아 있지 않고 해탈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일체개고인(一切皆苦印)이라는 것은 위에 말한 두 가지의 극단에 걸려 있는 중생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필연의 법칙이 되겠지만, 그것을 떠난 세계에서는 필요가 없는 단안(斷案)인 것으로 이런 면으로 볼 때에는 빠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삼법인(三法印)을 말할 때는 미혹(迷惑)의 중생계 입장에서 현실을 판단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로 보면 순관(順觀)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4.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열반이란 법어 Nirvana의 음역으로 번역하여서는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圓寂), 적정(寂靜) 또는 멸(滅)이라고만 쓰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열반이나 적정은 같은 뜻이 됩니다. 그러나, 원래 Nirvana란 말은 "불어서 끈다던지 혹은 불이 꺼진 상태"를 나타내는 정도의 말이었는데, 이 말이 불교에 흡수되면서는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미혹의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체득한 불교 최고 이상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심화(深化)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하여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 과정을 살펴보기 위하여 Nirvana의 원래의 뜻 중에서 '불' 즉 '타오르는 불'이란 개념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을 살펴봅시다. 이것은 그가 정각을 이루신 고장인 마갈다국의 우루벨라로 처음 돌아오시어 그를 따르는 천여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니연선하(尼蓮禪河)가 바라보이는 상두산(象頭山)에 올라 행하신 설법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정각을 이룬 석존께서는 처음 녹야원에 가서 교진여 등 5인을 교화하고 다시 베네레스성(城)의 부호의 아들 야사 등 오십인을 교화하여 각기 그들에게 한사람이 한 고장으로 가 전도할 것을 부탁한 후 자신도 또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이 곳에 오셨다고 합니다. "비구들이여 . 모든 것은 타느니라.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비구들이여. 눈(眼)이 탄다. 눈의 대상이 탄다. 눈이 닿는 모든 곳 모든 것이 탄다. 무엇에 의해 타는가. 나는 탐욕의 불에 의해 타고, 노여움의 불에 의해 타고, 어리석음의 불에 의해 타고, 노(老)·사(死)·우(憂)·비(悲)·고(苦)·뇌(惱)·절망(絶望)의 불에 의해 탄다고 말하고 싶다. 비구들이여 코(鼻)가 탄다 (내지는)...마음이 탄다..."(잡아함경 권 8.13) 그리고는 제자들을 향하여 한시라도 빨리 이러한 불에 타는 상태를 벗어나도록 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불'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찌하여 Nirvana란 말이 이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쓰여졌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불'이란 성냥불이나 장작 불같은 물질적인 불이 아닌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을 위시한 모든 번뇌, 모든 고통에 얽매여 방황하는 심신의 극히 불안정한 상태를 비유하여 가르킨 말이며 '타오르는 불이 꺼진 상태'의 열반이란 말은 이러한 불안정한 상태를 떠나 안정된 심신의 상태를 나타낸 말이다. 실로 중생의 모든 고통은 이 탐진치(貪瞋痴)가 그 기본을 이룬다. 우리는 어쨌던간에 이 탐진치를 여의어 고해(苦海)를 벗어나야만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배우는 목적도 여기에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열반(涅槃)이란 말은 그 만큼 자주 쓰이게 되었으며 쓰일 수록 그것은 비유의 말이란 개념을 점차 벗어나 궁극에는 '모든 번뇌를 떠난 무상안온(無上安穩 )의 해탈의 경지'를 나타내는 불교고유의 용어가 되어버린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내세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는 앞에서 일체개고인 (一切皆苦印)을 고찰하면서 일체(一切)가 개고(皆苦)로 돌아가는 원인은 모든 우주 인생의 만법을 바로 보지 못하고 온갖 망심(妄心)을 내는데 있었음을 알았으며, 이것은 중생으로 보아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해를 떠나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苦 또한 인연소생(因緣所生)이라 그 고(苦)를 만든 인연(因緣)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그 인연이 제거 되었을 때에는 고(苦)라는 것은 자연히 없어지게 되며, 우리는 모든 고통을 떠난 그야말로 열반의 경지에 안주(安住)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부처님께서 이를 스스로 증득하시었고 또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도 이를 증득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아라한(阿羅漢)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열반적정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法印으로 세워지는 것이고, 따라서 제행무상 (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삼법인(三法印)을 세울 때에는 미혹(迷惑)의 중생계(衆生界)가 아닌 정각(正覺)의 해탈계(解脫界)에서 현실을 판단한 것이라 하겠으며, 십이연기설로 보면 역관(逆觀)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열반은 또한 유여열반(有餘涅槃)이니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니 하여 이종열반(二種涅槃)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유여열반이라함은 비록 열반을 증득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 사대오온(四大五蘊)으로 이루어진 업보(業報)의 몸이 남아 있다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고 무여열반이라함은 그 사대오온의 신심(身心)이 다한 사후(死後)에 길이 안온한 경지에 이른다는 뜻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후세 우리가 부처님의 죽음을 대반열반(大般涅槃)혹은 반열반(般涅槃)이라 하기도 하는데 대반열반은 큰 죽음의 뜻이고 반열반은 그냥 죽음의 정도의 뜻입니다. 그리고 후대에 오면 열반이란 말이 바로 부처님의 죽음을 말하는 것처럼 쓰여져 왔고 또 현재에 와서는 스님들의 죽음을 통상 열반이라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서 온 것이며, 유여(有餘), 무여열반(無餘涅槃)을 나눈 자체가 이미 원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법인의 하나 하나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이제 이를 종합하여 보면.. 모든 현상계 제법(諸法)은 인연소생(因緣所生)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간적으로는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는 무아(無我)이다. 그러나, 이 이치를 여실(如實)히 보지 못하고 온갖 망심(妄心)에 사로 잡히면 이 세계는 모두 고해(苦海)로 나타나는 것이요. 반대로 이를 여실히 보고 망심을 떠나 이를 바르게 살려 가면 곧 열반에 이른다는 것으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현상 계의 미혹으로부터 열반적정(涅槃寂靜)에 이르도록 하는데 그 뜻이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이 각각의 법인(法印)을 연기법과 연결시켜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인법(三法印) 제행무상(諸行無常) - 연기(緣起)의 정의 중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에 해당 --- 현상계의 원리 제법무아(諸法無我) - 연기(緣起)의 정의 중 "차유고피기(此有故彼起)"에 해당 --- 현상계의 원리 일체개고(一切皆苦) -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의 순관(順觀)에 해당 ------ 중생계의 현실 사법인(四法印) 제행무상(諸行無常) - 연기(緣起)의 정의 중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에 해당 --- 현상계의 원리 제법무아(諸法無我) - 연기(緣起)의 정의 중 "차유고피기(此有故彼起)"에 해당 --- 현상계의 원리 일체개고(一切皆苦) -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의 순관(順觀)에 해당 ------- 중생계의 현실(現實) 열반적정(涅槃寂靜) -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의 역관(逆觀)에 해당 ------- 중생계의 (理想) |
출처 : 불교와문학마당
글쓴이 : 코스모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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