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心銘(사상과 명언)/불교교리와 불교문화

[스크랩] 불교의 근본사상

서울문화 2007. 11. 9. 21:21
" 불교의 근본사상(연기의 정의와 의의) "

불교의 근본사상은 누가 뭐라고해도 연기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은 곧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 법은 여래가 出世치 않거나 항상 법계(法界)에 있는 것이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등정각(登正覺)을 이루시고 사람들을 위하여 분별한다.> (잡아함경 권 12)

<만약 연기를 보면 법(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緣起)를 본다>(중아함경 권 7)

<오직 석가모니불뿐만 아니라 비바시불 등 과거 육불(六佛)도 모두 이 연기를 증득하여 정각을 이루시었다.>(잡아함경 권 15)
라고 되어 있는 바와 같이 연기법(緣起法)은 부처님께서나 혹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법계에 항상 있는 것이며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다시 말하면 성도(成道)하신 내용이며 부처님의 모든 법설(法說)은 이로부터 나왔으며 이것은 법(法 정법(正法))이며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이를 깨달으므로써 정각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제 먼저 연기의 정의를 알아 본 후 그 의의를 새겨보자.
경전상에는 이 연기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잡아함경 권 12)
<이것으로 인하여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나므로 저것이 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잡아함경 권 47)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상응부경 12. 21)
등으로 설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뜻의 문구는 실로 여러 곳에 나온다.
이들 중 우리가 흔히 연기의 정의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인데 이를 연기의 정의라 부르는 이유는 나머지의 것은 이의 의미를 부연한 것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연기의 정의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먼저 위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라는 문구가 서로 그 의미하는 바에 있어서 다른 점이 있다는데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그것은

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것은 <이것이 없다면 저것도 없다>는 것을 내포한 것으로 현상계 만유의 공간적 상의성(空間的 相依性), 관계를 나타낸 말이요.

②이것이 일으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라는 것은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는 것을 내포한 것으로 현상계 만유의 시간적 상의성(時間的 相依性)관계를 나타낸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이를 종합해 볼 때 이것과 저것이 나타내는 말은 어떤 두 가지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서로간의 상의성(相依性)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대표하는 것인 이상 모든 만유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하나도 독립됨이 없이 서로가 인(因)이 되고 또 연(緣)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인연생기(因緣生起)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실로 이 세상에 나타나 있는 것 중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그 어느 하나라도 독립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있는가.

모든 것은 인연생기한다는 이 연기법은 실로 고금을 막론한 영원한 진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인 연기법은 과연 어떤 의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석존께서 출가하여 입산 수도하신 동기가 하나의 진리를 찾자는 것이 아니고 중생에게 주어진 생사(生死)의 고통을 여의고자함에 있었으며 그리하여 그가 깨달은 것이 연기법이고 이로 인하여 정각을 성취, 생사의 모든 고통을 떠나셨다면 우리는 이 연기법이 하나의 단순한 개념적인 것이 아닌 우리의 모든 고통을 제거해 줄 수 있는 크나 큰 의의를 가진 진리임을 쉽게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석존 자신에게도 그가 갈구하던 바 모든 고뇌의 해탈을 이 연기법에서 깨달음으로써 성취하셨다면 이보다 더 큰 진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경에 의하여 그 의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를테면 상응부경에 의하면 석존께서는
① <무슨 까닭에 생사가 있는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사가 있는가.>
② <무엇이 없으므로 생사가 없는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사가 없는가.>하고 생각하셨다니 이는 연기법에 입각한 사유방법이라 연기법이 그대로 만유의 존재실상은 물론 중생의 모든 고뇌를 풀어주는 열쇠로 직접 활용되었던 것임을 말해 준다.

물론 이것은 연기법을 깨달음으로써 이미 해탈을 얻으신 석존이 중생제도를 위하여 제 2차적인 문제로 표현방법을 관(觀)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나 어쨌던 이 연기법의 의의는 생사고(生死苦)를 끊는 것만큼 더 큰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석존께서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찾을 수 있다. <비구들아 연기란 무엇인가. 생(生)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다. 이것은 내가 세상에 나오던 안 나오던 법으로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의성(相依性)이다.>(상응부경 2)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우매한 중생에게 생사를 여의는 충족한 연기법의 해답을 줄 수는 없었다.
석존께서 <내가 체득한 이 법은 심히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하여 심원하기에 지혜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져 좋아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은 인(因)이 있으므로 생겼다는 연기의 이치는 알기 어려울 것이다>
(상응부경 6)라고 한 것처럼 이런 중생들에게 이 법을 알려주기 위하여는 보다 자세하고 보다 조리를 갖춘 표현의 방법을 모색하여 이를 알려줌으로써 生死의 험한 고통을 떠나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석존께서는 이를 계속 사유한 결과 그 결론적인 표현방법을 얻었으니, 이것이 곧 다음에 나올 연기설입니다.

이 만고불변의 연기법에 대한 의의는 곧 우리중생 모두가 한결같이 바라는 것이며 모든 생사의 고통을 이 연기법에 의해 끊을 수 있다는데서 그 크나 큰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자신있게 正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 : 불교와문학마당
글쓴이 : 코스모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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